등굣길에서 만난 아기 어치 7마리 햇빛 가림막 설치 등 세심히 보살펴...입시로 지친 마음에 작은 행복 느껴
선물처럼 찾아와 2주간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었던 ‘어치 가족’에 대한 하루하루의 이야기를 기록해 본다. 어치는 한국과 유라시아 대륙에 서식하는 비둘기보다 조금 작은 체구를 가졌으며, 대담하고 호기심 많은 새이다.
2022년 6월8일 경기과학고의 모든 학생은 생활관을 나와 구름다리를 건너 본관으로 등교한다. 3년째 다니고 있는 똑같은 길, 난 눈 감고도 갈 수 있다. 그 익숙한 길에 선물이 찾아왔다. 구름다리와 본관이 연결된 모서리 부분에 무성하게 웃자란 담쟁이를 걷어내는 과정에서 갓 부화해 꼬물꼬물거리는 아기 새 일곱 마리가 발견됐다. 어떤 녀석이 둥지를 틀고, 알을 낳고, 그 알이 부화해 아기 새가 태어난 것이다. 물론 담쟁이로 덮여 있어서 그 과정은 아쉽게도 볼 수 없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이런 생명체를 볼 수 있다니.
■‘어치 가족’ 일지
6월9일 오늘 아침 등교하면서 보니 누군가 아기 새들이 보이는 구름다리 유리를 종이로 막아 둥지를 가려 놓았다. 그리고 그곳에 새의 사진과 함께 새의 이름을 ‘유라시아 어치’로 동정해 붙여 놓았다. 거기에 쓰여 있는 또 다른 한마디 ‘조금만 조용히 쉿~!’. 어제부터 어미 어치가 불안해하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고 걱정을 한 경기과학고 학생의 손길인 것 같다.
6월10일 가려진 종이 틈으로 보니 아기 어치들이 힘이 없어 보인다. 목도 들기 어려워하고 머리를 바닥에 대고 숨만 헐떡인다. 담쟁이가 없어지며 따가운 햇빛이 그대로 들어가 더 힘들어하는 것 같다. 교내 건의 사항 게시판에 어치에게 햇빛 가림막을 선물하자는 의견이 올라왔고, 곧장 어치 가족을 위한 까만색 천의 햇빛 가림막이 설치됐다. 나는 어미가 가림막 때문에 아기 어치한테 오지 못할까봐 걱정했었는데, 어미는 가림막 위에 앉아서 오히려 더 여유롭게 아기 어치들을 보살피고 있다.
6월13일 주말 동안 집에 다녀오느라 어치를 보지 못했다. 어치 가족이 너무 궁금했다. 조심스럽게 막혀 있는 종이를 들추고 어치를 보았다. 깃털도 보송보송해지고 제법 많이 컸다. 그런데 지난 금요일까지 분명히 일곱 마리였는데 한 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알아보니 한 마리가 구름다리 밑으로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그물망을 설치해서 떨어지는 어치를 받아서 다시 넣어주자는 의견이 게시판에 다시 올라왔다. 그러나 ‘그것도 자연의 섭리다. 안타깝지만, 우리가 받아들여야 한다’라는 의견이 대세가 되어 그물망은 설치되지 않았다. 떨어진 어치는 정성껏 묻어주었다고 한다. 나머지 여섯 마리는 절대 떨어지지 말기를.
6월15일 모든 경기과학고 식구들이 지나갈 때마다 종이를 들추고 사진을 찍는다. 그때마다 같이 있던 어미 어치는 엄청 스트레스를 받는 것처럼 보인다. 경계하는 눈빛에 살기가 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어치 둥지 위로 관찰카메라가 설치되었고, 그 영상이 둥지 바로 앞에 있는 TV 모니터에 중계되기 시작했다. 이제 종이를 들추지 않아도, 어미 새의 눈치를 보지 않고도 귀여운 아기 어치들을 맘껏 볼 수 있다. 많은 친구가 걸음을 멈추고 한참씩 TV 모니터 앞에 머물다 간다.
6월16일 어치가 나오는 모니터를 한참 동안 지켜봤다. 어미가 먹이를 가져왔을 때 아기 어치들이 어떻게 반응하며 먹이를 받아먹는지 살펴보니, 한마디로 전쟁이다. 서로 먼저 먹겠다고, 더 먹겠다고 한껏 입을 벌린다. 그러면 입 안쪽의 빨간 피부가 드러나고 그 붉은 빛은 벌려진 부리와 절묘하게 어우러져 하트처럼 보인다. 마치 ‘엄마,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것 같다. 먹이를 먹지 못한 아기 어치는 입을 벌리며 계속 보채지만 끝내 실망하고 만다. 먹이를 좀 더 먹기 위한 치열한 경쟁. 그 순간 나는 어치의 모습 속에서 익숙한 우리의 모습을 발견했다. 우리도 좀 더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친구와 경쟁하고 싶지 않다. 그보다 나는, 나 자신과의 경쟁에 더 성실한 사람이고 싶다.
6월17일 오늘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어미가 아기 어치들의 배설물을 치우는 장면이다. 먹이를 먹던 아기 어치 한 마리가 갑자기 엉덩이를 높이 들고 막 흔들더니, 거기에서 하얗고 둥근 배설물이 나왔다. 그걸 본 어미 어치는 아무 망설임 없이 받아먹었다. 다른 아기 어치들도 차례로 엉덩이를 흔들었고, 어미는 그것들을 모두 받아먹었다. 둥지의 오염을 막기 위한 본능일까? 모성일까? 신기한 마음에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6월20일 주말을 지나고 오니 아기라고 하기에는 아기 어치들이 너무 커져 버렸다. 언뜻 보면 어미와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날갯짓도 아주 힘차다. 갑자기 떠날까 봐 불안하다. 오늘 등교할 때 게시판을 보니 ‘어치 가족 이름 지어주기’ 이벤트가 진행 중이었다. 잘 몰랐었는데 지난주 금요일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게시판에 붙어있는 이름들이 날 웃음 짓게 한다. 역시 과학고 학생들이다.
‘수치, 통계치, 평균치, 가중치, 근사치, 오차’ (수학을 좋아하는 학생인가 보다.), ‘수새, 정과새, 물새, 화새, 생새, 지새’(이건 우리 학교에서 많이 배우는 과목명으로 만든 것 같다. 참, 정과새는 정보과학에서 왔다.), ‘저만치, 그만치, 자그마치, 일찌감치, 느지감치, 꼬치꼬치’,
‘구름, 다리, 유라, 시아, 어치, 인듯’ 등 이 외에도 기발한 이름들이 많았다.
6월21일 어제 새들의 날갯짓을 보고 불안했었는데, 오늘 어치 가족이 모두 떠나버렸다. 학생들은 저녁을 먹고 야간 1차시를 준비하는 한가한 시간. 날갯짓만 해오던 아기 어치들이 드디어 용기를 내었나 보다. 한 마리씩 둥지에서 뛰어내리며 힘차게 날개를 움직여 보지만, 멀리 가지 못하고 본관과 학습관 사이 계단 앞쪽에 모두 내려앉았다. 많은 학생이 몰려와 아기 어치들을 아주 가까이서 직접 보고 사진도 찍고 즐거워했다. 너무 사랑스러운 어치. 그런데 그때 이 녀석들이 계단을 올라가서 운동장 옆에 서 있는 소나무로 힘겹게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거기서 만나기로 약속했나 보다. 엉뚱한 방향으로 헤매고 있는 두 녀석은 한 친구가 조심스럽게 손으로 안아서 나무로 옮겨 주었다. 어미는 바짝 긴장해서 안절부절못하고 잔뜩 경계했지만, 우리는 마냥 행복하고 신기했다. 곧 시작된 야간 자율학습 시간, 우린 공부를 하러 학습실로, 솔마루로, 유리마루로, 학술정보관으로 흩어졌다. 그렇게 우린 어치 가족과 헤어졌다.
■자연과 함께한 값진 2주
6월의 따가운 햇빛과 함께 찾아온 사랑스러운 ‘어치 가족’이 있어서 우린 2주간 너무 행복했다. 우리 모르게 훌쩍 떠나지 않고, 이렇게 잊지 못할 마지막 이벤트까지 해주고 떠난 어치 가족에게 감사하다. 그리고 계속되는 공부와 다가올 시험, 입시에 마음 졸이며 지쳐있는 우리들의 작은 행복을 위해 카메라도 설치해 주시고 여러 가지로 맘 써주신 경기과학고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송혁중 경기과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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