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명상으로 보는 성(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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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규 철학박사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원인 인도 카주라호의 외벽에는 온갖 성애의 장면들로 장식되어 있다. 그러나 내부에는 성애의 조각은 물론 신성을 상징하는 그 어떤 대상조차 구성되어 있지 않다. 이는 바깥쪽에 표현된 욕망의 모습과 달리 안쪽은 내면의 신성을 찾고 확인하는 장소이며 명상을 위한 공간임을 말하고 있다. 프로이드의 관점에 의하면 표면에서는 모든 감각적인 것들이 성적인 상태에 있다고 하겠으나 명상이나 내면 수련의 체계에서는 이와 달리 자신의 중심에는 평화와 고요 그리고 초의식이 자리 잡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 사원은 성을 완전히 이해하고 또한 상대에 대한 존경과 이해가 바탕 된 사랑의 한 표현이었을 때 우리는 수평 이동이 아니라 수직 상승을 이루고 자신과 상대의 신성을 대면할 수 있음을 카주라호의 외부 장식이 보여주고자 하는 메시지이다.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나와 타자를 향한 근본에너지의 흐름은 끊임없이 우리의 삶을 파괴하게 될 것이다.

성은 자연이 마련해준 문이다. 따라서 동물도 이를 가진다. 새도 이를 가지고, 식물도 이를 가지며 인간도 역시 이를 가진다. 그러나 인간은 이 자연 에너지에서 진화를 이루었고 신성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극단적인 기준으로 제시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성의 가치를 생물학적 욕구의 자연적 차원에만 머물러 있다면 인간은 동물 이상이 아니며 동물을 넘어설 수 없다. 언급하였듯이 동물에게도 그 문은 열려있기 때문이다.

이 자연의 에너지를 살펴서 새로운 문을 발견할 때에 비로소 인간다움이라는 격이 나타날 것이다. 그때까지는 우리의 중심이 동물의 중심과 다르지 않을 것이며 겉보기에만 인간이다. 우리 안의 동물이 기회가 생기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깊은 성찰이 부재한 채로 이루어지는 사회적 장치들이 얼마나 소용없는 것이었는지는 이미 충분히 보아왔다. 전자발찌로 그를 구속하고 통제할 수는 있어도 문제에서 해방시켜 주지는 못한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정치가 특정 입장에 전도되어 이를 이용한다면 결과는 더욱 나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한 화가가 양치기 소년의 순수한 눈 속에서 신성을 발견하고 그 초상화를 그렸고, 이후 그는 인간의 모습을 한 악마를 그리기 위해서 모델을 찾아 다시 그 모습을 그렸으나 결국 동일인이었음을 알게 된 우화를 우리는 알고 있다. 석탄과 다이아몬드는 동일한 화학적 구조로 구성되어 있듯이 사람 마다의 삶에는 신과 악마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으며 두 개의 초상화를 그릴 수가 있다. 그러나 인간은 신성의 반영으로 삶을 지고한 낙처(樂處)로 만들 수 있으며, 그 삶을 향기롭고 조화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선, 위빠사나, 명상, 기도 등으로 불리는 내면의 성찰을 통해서.

최성규 철학박사·한국미술연구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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