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외국인 여성이 시골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 볏가리를 가득 실은 소달구지가 지나갔다. 옆에선 농부가 지게에 볏짐을 지고 터벅터벅 걸어 가고 있었다. 여성은 통역에게 “왜 힘들게 볏단을 지고 가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소가 너무 힘들까봐”였다. ▶미국의 소설가 펄벅(Pearl S. Buck) 여사의 ‘살아있는 갈대’에 실린 에피소드다. 한국을 찾았던 외국인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덕목 중 으뜸은 배려(配慮)였다. 이방인들에게는 문화적 충격일 수도 있었겠다. 외국의 농부였다면 저렇게 힘들게 짐을 나눠 지지는 않을 터였기 때문이었다. 온 가족이 달구지 위에 올라 타고 채찍질하면서 가지 않았을까. 그런데 우리의 농부들은 그렇지 않았었다. 말 못하는 짐승과도 짐을 나눠 지고 한 식구처럼 살았었다.
▶이런 고운 심성을 이젠 찾아볼 수 없다. 나밖에 모르는 천민자본주의가 득세하고 있어서다. 앞만 보고 달려온 탓에 어느새 우리 사회가 이런 각박한 세상으로 변했다. 필자가 동사(動詞)의 시제(時制)를 과거완료형으로 쓴 까닭이기도 하다.
▶폭염이 매일 우리를 괴롭히는 가운데, 에어컨은 커녕 선풍기도 없이 하루를 지내는 이들이 있다. 에어컨이 있어도 전기요금 탓에 틀 엄두도 못내는 이들도 갈수록 늘고 있다. 이른 바 에너지 빈곤층이다. 적정한 수준의 에너지 소비를 감당할 경제적 수준이 안 되는 이웃들이다. 문제는 이들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어 이들에 대한 지원 역시 미흡하다는 점이다.
▶경기도가 저소득 홀몸 어르신 790가구를 대상으로 벽걸이형 에어컨, 공동 전력량계를 사용 중인 취약계층 80가구에 전기요금을 줄일 수 있는 개별 전력량계 설치 등을 지원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같은 지원에도 연도별 에너지 빈곤층 비율은 감소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옛날 같았으면 옆집에 에어컨이 없다면 아무리 더워도 틀지 않을 수도 있었겠다. 더위를 피하기 위해 창문을 열어 놓은 옆집으로 우리집 냉방기 실외기의 뜨거운 바람이 들어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이 에너지 빈곤층 문제를 해소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콩 반쪽도 나눠 먹던 우리 선조들의 심성(心性) 고운 덕목(德目)이 아쉬운 요즘이다.
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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