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허공에 대한 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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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규 철학박사

허공, 즉 하늘에 대해서 명상을 해보자. 우리에게 시간이 있다면 하늘을 바라보며 때로는 눈을 뜨고 때로는 눈을 감은 채로 명상을 해보자.

이렇게 눈을 감아도 하늘에 대한 명상이 가능함은 우리의 내면에도 하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늘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포함돼 있다. 하늘은 항상 현존하면서도 동시에 부재(不在)이다. 하늘은 어느 곳에나 존재하지만,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하늘은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존재한다. 하늘은 모든 것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그 무엇도 담고 있지 않다.

하늘은 죄인이든 성인이든 선이든 악이든 아름다움이든 추함이든 모든 것들을 받아들인다. 가왕이라 불리는 조용필의 노래인 ‘허공’ 가사에서도 “사랑했던 마음도 미워했던 마음도 허공 속에 묻어야만 될~”이라 했다. 하늘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어서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도 없다.

검은 구름이 몰려오면 하늘은 그것을 위해 자리를 양보한다. 흰 구름이 몰려와도 마찬가지다. 하늘에는 어떠한 차별도, 어떠한 선택도 없다. 그저 받아들이기만 한다. 이것을 일러 역시 가수 김국환의 노래 제목처럼 타타타(tathata·如如)라고 부른다. 하늘은 이렇게 타타타의 상태로 존재한다.

그래서 타타타 상태의 하늘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

남자와 여자, 동물, 새, 나무, 돌, 별과 태양, 모든 것에게 무조건적이다. 누구나 가까이할 수 있다. 하늘은 모든 것을 보호해 주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돌보지 않는다. 구름은 오가지만 하늘은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하늘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됐지만 아직도 이슬처럼 신선하다. 하늘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우리는 사실 항상 내면의 하늘과 외부의 하늘 사이 문턱에 서 있다. 외부의 하늘이 무한하다면 내면의 하늘도 무한하다. 만일 우리가 외부의 하늘로 향한다면 그것은 기도가 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내면의 하늘로 향한다면 그것은 명상이 된다.

하지만 양자는 궁극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두 하늘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양자를 나누는 경계선은 항상 우리 자신이었다. 우리가 하늘처럼 ‘나’라는 에고와 ‘입장’이 사라진다면 그러한 경계선도 사라질 것이다. 그때는 안이 밖이고, 밖이 안이다.

우리의 존재 전체를 받아들이는 하늘은 그 존재를 감싸면서도 동시에 손끝 하나 대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하늘, 즉 반야라는 큰 지혜의 작용 방식이다.

최성규 철학박사·한국미술연구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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