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과 상식을 정부 기치로 내세운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지 100여일이 지났다. 그러나 짧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선거에서 득표한 득표율이 무색하게도 역대 최단시간 동안 지지율이 20%로 급락했으며, 심지어 미국의 모닝컨설트가 11일 공표한 전 세계 22개국 정상들에 대한 지지도 조사에서는 긍정 평가가 19%로 전 세계 꼴찌의 불명예를 안았다.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국민들에게 많은 기대감으로 높은 지지율을 받을 수 있는 임기 초반에 무엇이 이러한 사태를 만들었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필자는 대통령 및 보좌진들의 공감(共感, empathy)능력의 결핍이 불러온 결과라고 생각한다.
공감이란 ‘아, 그럴 수 있겠다’, ‘이해가 된다’, ‘이심전심(以心傳心)’ 등의 표현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상대방의 느낌, 감정, 사고 등을 정확히 이해하고 이해된 바를 정확하게 상대방과 소통하는 능력을 말한다. 그렇기에 공감이라는 영단어 ‘empathy’는 문자 그대로 안에서 느끼는 고통이나 감정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능력은 단순히 학습으로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활동을 함께하고 말 그대로 상대방 안으로 들어가서 고통이나 감정을 이해하려는 반복적 노력을 통해 자연스럽게 몸에 익혀지는 것이다.
수해 현장에 노란색 점퍼를 입고 기자들과 보좌진들을 대동해 방문하고 “내가 사는 아파트가 고지대인데도 1층에 벌써 침수가 시작이 되더라”라고 얘기하며 수재민들의 아픔을 공감한다고 말한 것은 사태에 대한 공감을 표현하는 말이 아니다. 특히 여당의 지도부는 수재민을 돕겠다고 출동한 현장에서 “솔직히 비 좀 왔으면 좋겠다. 사진 잘 나오게” 등과 같은 망언을 뱉어냈다.
국민만 바라보고 가겠다는 대통령과 국민을 위해 ‘오직 민생’을 외치는 여당이 공감능력이 있다면 단순히 사고현장에 나타나 보여주기식으로 ‘공감한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에도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처럼 항상 사태가 발생한 후에 공감한다고 하는 말과 행동은 결국 언제, 어디서든 그 한계를 드러내 문제를 만들기 때문이다.
지난 14일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국내외에 알리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고자 2017년도에 제정된 국가기념일이다. 말 그대로 국가의 행사이고 당연히 국가의 수장인 대통령이 주체해야 하는 행사임에도 대통령은 어떠한 메시지도 내놓지 않았다. 여당은 저녁 6시가 돼서야 “국민의힘과 윤석열 정부는 이 아픈 역사의 외침이 절대 잊혀지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라며 “피해자 할머니들의 편에 서서 증언과 역사적 기록을 수집하고 연구를 지원하겠다. 인권과 평화, 자유를 위해 외쳤던 소중한 역사들을 잘 보존하고 계승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참석도 하지 않고 대통령이 어떠한 메시지도 내놓지 않은 이 상황에서 이러한 논평을 과연 공감한다고 할 수 있을까?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인 링컨 대통령은 “한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 있고 여러 사람을 잠시 속일 수 있지만 여러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라고 말했다. 비법은 실체가 없고, 편법은 오래가지 못하며, 꼼수는 언젠가 더 큰 후유증과 역풍을 부른다는 얘기이다. 단순한 보여주기로 사람들을 잠시 동안 혹세무민할 수는 있다. 하지만 공감과 진정성이 없다면 이는 절대 오래갈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하길 바란다.
윤준영 한세대 휴먼서비스대학원 공공정책학과 교수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