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남순강화

키는 작았지만 넘어지면 반드시 일어났다. 불굴의 지도자였다. 그리고 정치인이었다. 그래서 곧잘 ‘작은 거인’ 또는 ‘오뚝이’ 등으로 불렸다. 실용주의자였던 중국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의 얘기다.

▶그는 마오쩌둥(毛澤東)과는 여러 측면에서 달랐다. 개혁개방정책을 펼쳤다. 과감했다. 건국 이후 닫았던 국가의 문도 활짝 열었다. 그런 그에게 어려움이 닥쳤다. 첫 번째는 1988년 톈안먼(天安門) 민주화시위였다. 두 번째는 이듬해 소비에트연방(소련)의 붕괴였다. 반대파들이 사회주의를 강화해야 한다고 공격했다. 그는 반격에 나섰다. 남순강화(南巡講話)는 그렇게 시작됐다. 1992년 1월18일부터 2월22일까지 이어졌다.

▶그가 북쪽이 아니라 남쪽을 택한 건 ‘신의 한 수’였다.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전통적으로 북쪽에는 보수세력들이 득세하고 있었고, 남쪽에선 개방 성향이 짙었기 때문이다. 우한, 선전, 주하이, 상하이 등 남쪽의 대도시들을 돌면서 개혁개방의 당위성을 주창했다. 그때의 골자가 “사회주의도 시장이 있어야 한다”였다.

▶그해 오늘 중국은 우리와 수교조약을 맺었다. 이후 공식적으로 숱한 국내 기업들이 중국으로 건너갔다. 대륙은 곧 기회의 땅이었다. 우수한 노동력에 저렴한 인건비 등이 포인트였다. 중국 정부가 제공하는 각종 세금면제 등도 한몫했다. 당시 인천항에서 출발하는 카페리는 물론 김포공항에서 출발하는 항공편 개설도 잇따랐다.

▶덩샤오핑의 남순강화가 없었다면 한국과의 수교도 어려웠다는 게 중국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오늘날 우리의 전체 무역량의 40%대를 차지하는 대(對)중국 무역체계는 덩샤오핑의 선물이었다. 그렇게 강산이 세 번 바뀌었다.

▶중국도 많이 변했다. 중국이 ‘제로 코로나’ 정책 고수 비용은 늘어나는 반면, 부동산 침체 등에 따른 세수 감소로 재정수입이 급감하고 있다. 일부 지방정부는 대중교통 운영을 중단하고 공무원들의 월급도 체불하고 있다. 중국의 그늘이다.

▶한중수교 이후 30년 동안 한국의 전체 수출 규모는 9배 늘었지만 대중국 수출은 160배 넘게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일단 우리 입장에선 성적이 그리 나쁘진 않다. 앞으로 30년 후 한중수교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할까.

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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