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대면의 시대가 가속화 되면서 연극이 설 자리는 점점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연극인들의 제작환경은 점점 더 열악해지고 있다. 내 주변의 동료 연극인들이 연극 한 편을 올릴 때마다 그들의 뻔한 살림살이가 걱정돼 늘 ‘관객은 많아?’라는 말로 서로의 안녕을 묻는다.
20여년 전 연극 시장은 그래도 좋은 연극에는 관객이 줄을 지었다. 굳이 인기 배우들이 출연하지 않아도 좋은 연극에는 늘 관객들이 모였다. 이즈음 연극은 극단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열을 내며 생산됐다. 인터넷 예매도 어려웠고 모든 것이 다 불편했던 이 시기 오히려 연극은 더 빛을 내고 있었다. 가끔 그 시절에 연극 한 편을 보기 위해 불편하게 줄을 지어 기다렸던 관객의 행렬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지금은 연극 제작 시스템이 매우 선진화됐고 다양한 방법으로 공연을 알릴 수가 있지만 연극을 보러 극장을 찾는 관객의 숫자는 매우 줄었다. 일부 소수의 인기 배우의 팬덤에 의지한 공연 이외에 순수하게 좋은 연극을 관객에게 선보이는 극단의 공연들은 관객의 외면을 받고 있다. 극단들은 순수하게 관객 수익만을 고려해 공연을 제작할 수 있는 형편이 못 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극단은 지원금에 의지해 연극을 간신히 제작하는 상황이며 지원금마저도 부족해 공연을 하고 나면 극단은 적자에 허덕인다. 일부 상업 연극 시장을 제외하고 순수 연극이 설 자리는 더 줄어들고 있다. 연극을 전업으로 했던 훌륭했던 그 많던 배우들은 OTT 드라마, 영화 그리고 TV 드라마로 다수 이동해서 연기하고 있다. 연극을 지키는 훌륭했던 예술가들도 더는 지금의 연극 제작환경에서는 버틸 수 없는 상황이다.
첨단의 시대로 접어드는 지금 이때 왜 연극이 필요한가? 연극은 과연 어디로 향해 가야 하는가? 연극은 어떻게 보면 참 불편한 장르다. 정해진 공간에 정해진 시간에 모두 모여야 성립이 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조그마한 식당에 가도 반갑게 맞이하는 인간 대신 키오스크로 다양한 메뉴를 선택하고 주문하는 시대다. 이런 키오스크의 등장이 처음에는 매우 낯설고 불편했지만, 지금은 키오스크의 주문이 훨씬 편안함을 준다. 인간은 점점 더 인간을 대면하는 일에 불편해하고 고립을 즐기고 있다.
인간 고립의 속도는 매우 빨라지고 메타버스의 세계에 인간들은 열광한다. 고립의 시대에 고독해지는 인간은 과연 안전한가? 이대로 옳은 것인가? 연극은 더욱이 순간에 타올라 사그라드는 불꽃과도 같은 예술이다. 고립이 가속화되고 있는 지금의 우리에게 연극은 인간 대면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연극은 불편하지만 인간 대면을 요구하고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을 점유하여 시대의 공감을 이끈다. 바로 이점이 우리에게 연극이 필요한 점이라 생각한다. 연극은 고독한 인간을 구원하고 인간이 함께하고 공유하는 아름다움에 주목하는 예술이다. 다양한 기기를 통한 동영상의 홍수 속에서 인간은 인공지능 알고리즘에 의식이 꼭두각시가 되어가는 지금 더욱더 사유를 제공하는 연극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관객 저변이 확보되지 않으면서 단순 정부의 지원만으로는 우리의 아름다운 연극이 생존하기는 어렵다. 관객 저변 확대를 위한 노력이 다양한 방법으로 시도돼야 할 것이다. 더 좋은 연극이 만들어지도록 정부는 상업적인 목적을 완전히 배제한 연극 전용 공간 마련에도 힘을 써야 한다. 상업적인 이유로 연극을 더는 사지로 내몰아서는 안 될 일이다. 새로이 건립될 연극 전용 국립극장도 연극인들과 연극을 사랑하는 관객의 열망을 담아 상업적인 논리를 완전히 배제한 제대로 된 국립극장을 건립해 우리의 연극을 제대로 지켜주길 바란다.
구태환 수원시립공연단 예술감독·인천대학교 공연예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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