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최초’는 존재한다. 그리고 그 처음을 이룬 사람 또는 단체 등을 기리기 위한 한 줄은 곧 ‘역사’가 된다.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를 예로 들어보자. 에드먼드 힐러리(Edmund Percival Hillary)는 뉴질랜드의 등산가이자 탐험가다. 1953년 영국의 에베레스트산 원정대원으로 선발돼 그해 5월29일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와 함께 에베레스트산을 처음으로 올랐다. 그 공로로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고, 세계 최고봉 ‘최초’ 등정이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탐험가 중 한 사람으로도 선정됐다.
이후 전 세계의 무수한 탐험가 및 산악인들은 그들만의 ‘단독’ 원정대를 꾸려 세계 최고봉에 올랐지만 네팔 정부 또는 중국 정부의 공식 등정서를 받을 뿐 역사에 길이 남는 영광을 누리진 못했다. 역사가 알아주는 그것이 ‘최초’와 ‘단독’의 차이다.
▶10년 차 이상 된 기자들은 사실 젊음과 바꾼 인맥으로 하루 하루를 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족과 친구 대신 출입처 사람들, 정보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친분을 맺어 기사의 토대가 되는 첩보 또는 정보를 알게 된다. 그리고 팩트 체크를 해 기사를 완성한다. 숟가락만 얹어 가져갈 수 없는 노력의 산물인 것이다. 예전에 필자가 사건 기자를 했을 때만 해도 타 언론사의 최초 보도는 소위 ‘물 먹었다’라는 표현으로 대변돼 선배들에게 깨지며 단련된 뒤 또 다른 최초 보도를 하기 위한 초석이 됐다. 하지만 요즘은 다른 사람의 노력의 결실을 인터셉트(intercept·가로채기)해 마치 자기들 것인 양 포장하는 기술자들이 많이 늘었다.
▶‘수원 세 모녀’ 비극 사건이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고 있다. 대통령까지 특단의 조치를 주문하며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이들의 안타까운 사연은 경기일보의 기자들이 ‘최초’ 보도했다. ‘최초’ 보도가 없어 그냥 단순 변사 사건으로 처리됐다면 이들의 어려움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고, 사각지대에 선 또 다른 이들을 위한 대책도 마련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최초’는 인정받아야 한다. 경쟁에도 상도덕은 있다.
김규태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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