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봉투법’. 노조의 파업으로 발생한 손실에 대한 사측의 손해배상을 제한하는 내용 등을 담은 법안으로 2014년 법원이 쌍용차 파업 참여 노동자들에게 47억원의 손해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리자 한 시민이 언론사에 4만7천원이 담긴 노란 봉투를 보내온 데서 유래된 것이다. 이로 인해 시작된 해당 법안은 노조법상 손해배상 책임이 면제되는 합법 파업의 범위를 확대하고 노동자 개인에게는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못하게 한 것이 핵심이었으나 19, 20대 국회에서 연이어 폐기됐고 현재 21대 국회에도 발의돼 계류 중이다.
얼마 전 다리도 마음대로 펼 수 없는 0.3평의 조그만 철골 감옥에 하청업체 노동자가 스스로를 가둔 사건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극한의 상황에 스스로를 몰아 놓고 목숨을 걸어가며 투쟁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임금과 근로조건의 개선이다. 노사 양측의 극적인 타결로 문제가 해소되나 싶었지만 사측인 대우조선해양은 파업을 벌인 하청노조 집행부 5명에게 불법 파업을 이유로 470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배상금액은 1인당 95억원으로 근로조건 향상을 외치며 최저임금 수준의 200만원을 받는 노동자에게 월 200만원씩 400년을 갚으라는 건 말도 안 되고 불가능한 금액으로, 노동자에게는 거의 ‘살인행위’나 마찬가지다.
소송에서 승소한다 하더라도 실제적으로 받을 수 없는 금액임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사측은 하청노동자에게 배상금을 받아 손실을 메울 목적으로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하는 것일까? 당연히 아닐 것이다. 표면적 이유로는 법과 원칙에 따라 불법 파업을 근절한다고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노조 길들이기’라는 아주 단순한 이유다. 추경호 경제부총리부터 국민의힘 의원, 대통령실까지 모두 이 사건에 대해 단호한 메시지를 내고 있기에 대선 당시부터 노조와 대립각을 세우는 발언을 쏟아내고 부자감세를 실행하고 있는 대통령을 생각해 보면 상식선에서 ‘불법 파업 근절’이라는 이유보다는 ‘노조 길들이기’라는 명분이 더 그럴듯하게 느껴진다.
당연히 불법 파업은 근절돼야 한다. 하지만 법은 사람을 이롭게 할 때 가치가 있는 만큼 그 판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누구를 이롭게 하는 것인가를 판단하는 게 아닌가. 교섭 당사자가 아니라고 책임을 회피한 대우조선해양이나 원청이 대화에라도 나섰다면 손해는 얼마든지 막을 수 있는 상황임에도 도급계약에서 이미 노동자의 임금과 노동조건이 결정됐다는 이유로 헌법이 보장하는 파업권조차 원청과 하청의 구조적 모순의 계약서 앞에서는 불법이 돼버린다. 결국 법과 원칙을 강조해 불법과 합법으로 나눠 판단했다고 하지만 원청과 하청 사이의 구조를 정당화하는 불합리하고 나쁜 법을 지키기 위해 손해배상이라는 더 나쁜 법이 이를 보호하고 있는 형국이다.
우리 모두는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원한다. 노란봉투법은 시작부터 생겨난 원청과 하청의 구조적 모순의 룰을 현재의 잘못된 잣대로 판단하지 말자는 얘기로, 노조의 불법을 다 면책하자는 것이 아니고 원청과 하청의 잘못된 구조적 모순을 바로잡자는 이야기다. 그러나 권성동 의원은 이를 두고 “불법 파업을 조장하는 ‘황건적 보호법’에 불과하다”는 모욕적인 발언까지 했다. 그렇다면 황건적의 난 당시에 황제와 사적 관계를 이용해 농민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 환관과 외척이 그들의 폭정으로 인해 좌절과 실의에 빠진 선량한 농민인 황건적보다 낫다는 이야기인가.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에 명언이 숨어 있다. “뭉치면 백성이요 흩어지면 도적이다.” 대통령실이나 여권의 정치인들이 이 영화를 봤다면 노란봉투법이 다시 쟁점으로 떠오른 이 시기에 뭉쳐 있는 백성의 절규를 단 한 번만 되돌아보라. 진정 그들이 흩어진 도적이 되길 원하는가.
윤준영 한세대 휴먼서비스대학원 공공정책학과 교수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