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0년 11월, 영조는 탕평책을 시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붕당 간의 갈등을 안타까워하며 “만약 좋아하면서도 나쁜 점을 살필 수 있고 미워하면서도 아름다운 면을 알 수 있다면(好而知其惡, 惡而知其美), 어찌 파당을 지어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배척하는 습속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영조의 이 말은 ‘대학’ 전(傳) 8장을 인용한 것인데, 여기에 보면 “사람은 친하고 사랑하는 데에서 편벽되며, 천하게 여기고 미워하는 데에서 편벽된다(人之其所親愛而辟焉 之其所賤惡而辟焉)”라는 대목도 나온다. 내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거나 좋아하면 그 사람에게 관대해진다. 그 사람이 하는 일은 다 좋아 보일 뿐 아니라 단점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심지어 잘못을 저질러도 예뻐 보인다. 좋아하는 감정이 눈을 멀게 하고 마음을 치우치게 만듦으로써 올바른 판단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상대방을 싫어하고 미워하는 경우도 결과는 다르지 않다. 상대방을 못마땅해하는 감정이 마음을 뒤덮으면서 하나부터 열까지 그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장점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별것 아닌 일도 트집을 잡고 비난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집단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흔히 자기가 속해 있거나 지지하는 집단에 관대하다. 내부에 문제가 있어도 눈감고, 잘못이나 실책이 나와도 부득이한 일이었다며 옹호한다. 호위무사를 자처하며 맹목적인 지지를 보내는 사람도 있다. 반면 상대편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다. 장점을 무시하고 좋은 일을 해도 외면한다. 어떻게든 잘못을 끄집어내어 비난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 살펴주기는커녕 비아냥거린다. 같은 일을 해도 이쪽이 무조건 옳고 저쪽은 무조건 틀렸다는 도식을 내세우니, 자연히 양쪽의 갈등은 격화될 수밖에 없다. 상대방에게 깊은 원한을 품기도 한다.
어떻게 해야 이 같은 상황을 해소할 수 있을까. 사람인 이상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이 없을 수는 없다. 나와 잘 맞는 집단이 있고 나와 맞지 않는 집단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를 완벽히 극복하고 객관적인 마음으로 모두를 대할 수 있는 사람은 ‘대학’을 지은 증자의 말처럼 세상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아마도 성인(聖人) 정도는 돼야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은 “좋아하면서도 나쁜 점을 살필 수 있고, 미워하면서도 아름다운 면을 아는” 수준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고쳐야 할 점을 발견하고 미워하는 사람에게서 본받아야 할 점을 찾고자 노력하다 보면, 조금씩 치우친 마음을 바로잡아 갈 수 있을 것이다. 또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진정으로 위하는 길이기도 하다. 싫어하는 사람과도 서로를 존중하며 합의점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서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극심한 대립이 벌어지는 요즘, 우리가 기억해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김준태 성균관대 유학동양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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