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나 야구경기가 끝나면 승자든 패자든 선수 또는 감독과 인터뷰를 하게 된다.
그런데 패자의 경우, 거의 공통된 것은 패배의 원인을 자기 실력보다 다른 곳으로 돌리려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감독이 선수 교체의 타이밍을 놓쳤다든지 심판의 오심이 원인이라는 등등. 스포츠 경기뿐 아니라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나쁜 일이 생기면 그 원인을 다른 것에서 찾아 실패에 대한 위로를 받고자 한다. 심지어 길을 걷다 부주의로 넘어지게 되면 먼저 구청장이나 시장을 비난하기도 하고 대통령을 원망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물론 구청장이나 시장이 도로를 잘못 관리한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길에서 넘어진 자신의 부주의는 생각 않고 원망의 대상부터 찾는 것이 합당한 것일까.
핼러윈데이가 무엇인데 왜 거길 갔느냐는 소리도 있다. 그러나 이태원에 간 젊은이들에게 잘못이 없다. 한창 가슴이 뜨거운 청춘들이 오랫동안 코로나19에 갇혔던 터라 핼러윈에서 무엇인가 위안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만약 필자도 그렇게 젊음이 있었다면 이태원에 갔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지금 가장 크게 지적되는 것은 경찰의 책임일 것이다. 사실 112 신고에 대한 녹취록이 공개되기 전까지는 그런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녹취록의 생생한 부르짖음은 더 이상 경찰이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미 사고 4시간 전에, 그러니까 오후 6시34분부터 ‘압사 당할 것 같다’로 시작해 ‘통제가 필요하다 ...’ 등 112에 조치를 요구하는 외침이 계속됐으나 경찰은 늑장 출동을 한 것이다. 특히 이들 112 신고 11건 중 ‘압사’라는 말이 6건이나 되는데 경찰은 ‘압사’라는 말뜻을 몰랐던 것일까. 이태원 좁은 골목을 더 좁게 만들어 사고를 키웠다는 해밀톤호텔도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해밀톤호텔은 폭 4m의 골목에 설계에도 없던 붉은 가벽을 마음대로 설치하면서 3m로 대폭 축소시켰고 이 때문에 사고 당일 인파의 병목현상을 일으켜 희생자가 많아졌을 것이다. 이태원 골목의 소음을 사고 원인의 하나로 지적하기도 한다. 여기저기 설치한 스피커에서 쏟아지는 음악 소리에 ‘내려가라’라든지 질서를 요구하는 외침, 심지어 경찰에 신고하는 음성까지도 제대로 소통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용산구청과 경찰이 좁은 골목을 일방통행으로 만들지 않은 것도 도마에 오르고 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을 겪은 홍콩의 경우 좁은 골목을 자동차뿐만 아니라 사람까지도 일방통행을 하게 해 사고를 예방하고 있음이 그 좋은 예다.
이 밖에도 그동안 핼러윈 행사를 너무 외형적으로 다뤘던 메스컴을 원망하는 의견도 있다. 다 맞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모두 우리 어른들의 책임이다. 그런데 이 많은 문제 중에서 정치권이 정략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만 골라 부각시키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사건 발생 후 정쟁을 중단하고 초당적으로 협력하겠다는 다짐들은 벌써 사라지고 이 비극을 정쟁의 도구로 삼아 국민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야말로 가슴 아픈 일이다.
30년 전 한국 천주교는 ‘내 탓이오’ 운동을 벌인 일이 있다. 김수환 추기경이 앞장서 승용차에 ‘내 탓이오’ 스티커를 붙이는 등 큰 호응을 얻었다. 정파나 종교, 남녀, 노사... 모두가 이념과 진영을 넘어서자는 ‘내 탓이오’ 운동이 지금 이 끔찍한 비극 앞에 우리가 가질 자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변평섭 前 세종특별자치시 정무부시장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