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가 파편화되고 있다. 공동체가 개인화로 흩어지고, 개인은 더 미세한 존재로 분해돼 극소단위로 분화됐다는 의미의 ‘나노사회(Nano Society)’라고 칭한다. 나노사회의 특징은 조각조각 흩어지는 모래알, 끼리끼리 관계 맺는 해시태그, 내 편의 목소리만 믿게 되는 반향실이기에 모르는 타인과 연결하는 감각이 둔화되고 있다.
간디는 종교의 진수를 묻는 질문에 “친구하고 친하게 지내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원수라고 여겨지는 사람과 친구가 되는 것이 종교의 진수입니다. 종교에서 다른 것들은 장사에 불과합니다”라고 답했다. 즉, 종교의 핵심이 원수와 ‘친구 되기’라는 것이다.
나노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울타리를 설정하면서 다른 이들을 의심하고 경계한다. 이러한 모습을 철학자이자 작가인 한병철은 “자기와 이질적인 것은 거부하는 시대”라고 면역학적으로 정의하면서 연결이 아닌 분리와 단절, 파편화된 사회를 지적한다.
누가복음 10장에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이웃의 개념을 드러낸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빼앗기고 얻어맞아 초주검이 된 ‘어떤 사람’이 등장한다. 이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제사장과 레위인과는 달리 유대인들이 멸시하고 혐오하던 사마리아인은 응급처치를 한 후 여관에 돈을 내며 다친 사람을 맡긴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는 진정한 이웃이란 나와 비슷한 동질성이 있거나, 가까이 사는 이들이 아닌 “사랑과 자비를 베푼 사람”임을 명확히 선포한다.
대학에서 ‘문화콘텐츠와 성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소개하면서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눅 6:32)라는 화두를 던지며 통찰을 요청했다. 노소정 학생이 제출한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모습’은 현대사회에서 비일비재하다. 10·29 핼러윈 참사로 소중한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을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들 울타리에 국한된 관점으로 다양한 희생양을 찾아 비난의 화살을 쏘아 댔다. 뿐만아니라 내 아이만 챙기는 부모들, 내 이익만 챙기도록 보채는 사회, 우리 공동체만 잘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현대 풍조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나타난다. 평론가 신형철의 책 ‘인생의 역사’에 “때로 너의 죽음은 기어코 나의 죽음이 된다”는 글이 있다. 한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그 사람의 주변, 나아가 그 주변으로 무한히 뻗어가는 분인(dividual)들의 연결을 파괴하는 짓이다. 왜 사람을 죽이면 안되는가? 누구도 단 한 사람만 죽일 수는 없다. 살인은 언제나 연쇄살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념들은 나에게 비로소 ‘죽음을 세는 법’을 알도록 했다. 죽음을 셀 줄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애도의 출발이라는 것도.’
참사의 순간, 연결의 감각이 살아있었던 이들은 경찰서에 신고했고, 숨이 멎어 가는 사람들에게 심폐소생술(CPR)을 실시했으며, 어떻게든 도움의 손길을 펼치려 노력했다. 이 연결의 감각은 착한 사마리아인, 진정한 이웃으로서 살아가는 사랑과 자비의 언행이다.
우리는 더 넓은 연결의 감각이 필요하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연결만이 아니라 이 순간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숭고한 연결의 감각이 필요하다.
양승준 세종대 대양휴머니티칼리지 초빙교수·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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