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줄에 걸린 안개가 보석처럼 빛났다. 거미는 안마당을 비워 놓은 채 벗을 기다리듯 느긋하다. 안개 잦은 겨울 아침, 거미줄과 안개와 햇빛이 빚은 환상적인 풍경이다.
새집이 있다. 벌집이 있다. 아프리카흰개미 집이 있다. 인간의 감각을 초월할 정도로 구조적이고 정밀하다. 새집과 벌집이 그러하듯 흰개미집은 인간이 만든 최고의 건축시스템보다 더 효율적이라 했다. 인간은 자연을 모델로 진화를 거듭했다. 인간이 보기에 그대로인 것 같지만 지구 생태계 생성 이전부터 새집과 벌집, 개미집이 존재하지는 않았다. 원시시대 움막에서 마천루로 진화한 인간 진화의 속도와 다를 뿐, 그들도 진화한다.
코끼리, 코뿔소, 사자, 호랑이는 집을 짓지 않는다. 영역을 지배한다. 미물은 낮추며 산다. 바이러스는 인간을 시험에 들게 한다. 모든 존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우주의 아름다운 별, 지구란 행성에 왔다.
인간은 새처럼 집을 짓고 호랑이처럼 영역을 지배한다. 옛날 옛적부터 동굴에 흔적을 남길 줄 알았고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을 지었다. 21세기 파라오를 꿈꾸는 빈살만은 새로운 미래를 의미하는 네옴시티를 시작했다. 온 우주에 비해 바이러스 크기에 불과한 인간은 교(敎)와 행(行)이 새의 양 날개처럼 등가를 이루며 문명을 창조했다. 광의적으로 우주에 기거하는 모든 것은 창조다. 예술이다. 그 사이에 인간의 예술이 경기를 일으킬 경천동지할 사건이 발생했다. 인공지능(AI)이다. AI는 순식간에 엄청난 그림을 쏟아낸다. AI가 그린 그림을 보는 순간 말을 잃었다. 낯설고 익숙한 모든 유형의 꼴이 망라됐다.
AI는 인간의 창조물이다. 생물학적 자식이 아니라서 호모사피엔스의 종말이라 우려하지만 메타 호모사피엔스의 기원으로 긍정할 일이다. 당연히 AI 가 그린 그림도 예술이다. 예술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라서 그렇고, 진화의 속성은 실수로 던진 패라도 윷판처럼 백도가 되지 않기에 그렇다.
이달 1일 공개된 AI가 만든 챗봇 ‘Chat GPT’를 두고 뉴욕타임스는 “경외심마저 든다”고 했다. 이미 인류사의 상수가 된 AI는 인간의 수를 한참 넘어섰다. “AI 시대는 빅데이터가 생명이다.” 이어령 선생의 통찰은 현상이 됐다. 그럼에도 인간이기를 축복하는 예술과 종교와 철학의 경계를 초월한 인류 문명사의 위대한 창조, 파르테논이 있다. 피에타가 있다. 모나리자가 있다. 미켈란젤로가 시작부터 피에타를 조각하거나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그린 것은 아니다. 생명을 다해 돌을 다듬고 그림 하던 어느 순간, 돌 속에 있는 지저스와 마리아를 보았다. 내 속에 있던 어미(母)의 자비가 차가운 돌 속에 있던 지저스의 생명이 됐다. 삶은 죽음에 의해 생명을 얻는다. 죽음은 삶에 의해 정체를 가진다. 나도 없고 너도 없는 양망(兩亡)의 세계, 피에타가 됐다. 모나리자가 됐다. 부활의 참이다. 윤회의 참이다.
정으로 돌을 조각한다. 칼로 나무를 조각한다. 지저스가 되고, 붓다가 된다. 그런데 단 한 가지 정으로, 칼로 조각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인간이다. 인간이 기도하고 수행하는 이유다. 내 속에 있는 지저스와 붓다를 조각하기 위해서다. 모든 인간에게 내재한 경이로운 세계, 이것이 지저스와 붓다의 존재 이유다. “최고의 작품은 내 안에 있다.” 죽음을 앞둔 미켈란젤로의 말도 같은 의미다. 모든 것에는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다.
2022년이 저문다. 영원으로 간다. 인간을 성찰한다. 예술을 성찰한다.
한잔의 차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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