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체험 삶의 현장’이라는 TV 프로가 있었다. 1993년부터 20여년간 일요일 아침 시간대를 롱런했다. 각계 명사들과 스타들이 ‘하루 일꾼’으로 막노동을 하는 포맷이다. 곳곳의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땀과 노동의 가치를 생생하게 안방에 전달했다. 해양수산부장관 시절의 노무현 전 대통령도 출연했다. 해양 폐기물 수거 현장의 진흙탕을 맨몸으로 뒹굴었다. 당시 MC 이경실씨가 촬영 뒷얘기를 전했다. “그분 진짜 진짜 열심히 하시더라.” 그 프로는 종영했지만 체험 현장이 이어지기는 했다. 선거철 정치인들의 식상한 서민 코스프레식 체험 현장들 말이다.
새해 벽두, 영하의 새벽을 녹인 체험 현장 두 곳이 따뜻한 여운을 남겼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2일 새벽 서울 상계동의 한 버스정류장을 찾았다. 강남역까지 가는 146번 버스 첫차가 오전 4시5분 출발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 첫차는 3대나 동시에 출발한다. 이 차를 기다리는 이들이 워낙 많아서다. 새벽같이 서울 강남의 고층빌딩 타운으로 일하러 가는 빌딩 청소부, 경비원 등이다.
그들에게 한 가지 오랜 소원이 있었다. 첫차 시간이 오전 4시5분에서 3시50분으로 15분이라도 당겨지는 것이다. 그들의 일은 사무실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에 끝내야 한다. 가급적 직원들 눈에 띄지도 않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차에서 내려서도 늘 달음질을 쳐야 한다. 지난 연말, 이런 사연이 총리실에 전해졌다. 한 총리가 오세훈 서울시장과 논의해 새해에는 그 소원이 이뤄지게 됐다. 한 총리가 이날 새벽 버스에서 이 소식을 전했다. 첫차 승객들은 “새해부터 운이 좋네”라며 기뻐했다.
훈훈한 체험 현장은 인천에서도 있었다. 유정복 인천시장은 새해 첫 행보로 2일 새벽 거리 청소 현장을 찾았다. 남동구 인천논현역 인근에서 박종효 남동구청장, 환경공무원들과 함께 청소복 차림으로 나섰다. 생활쓰레기를 수거하고 거리를 청소하느라 땀을 흘렸다. 유 시장은 도로 곳곳에 버려진 쓰레기를 쓸어 담거나 밤새 쌓인 종량제 쓰레기 봉투들을 수집운반 차량으로 날라다 실었다. 일을 마치고 일선 환경공무원들과 자리를 함께해서는 안전한 근무 여건 지원을 약속했다.
정치뿐 아니라 자치행정에서도 공허한 구호만 요란한 요즘이다. 소통, 상생, 혁신, 창조, 민생, 공정, 평화 등등. 생업에 쫓겨 달음질치는 시민들에게는 뜬구름 잡는 소리다. 구호는 이제 그만 됐다. 민생 문제는 그 자체가 삶의 현장이다. 목민관이라면, 단내 나는 시민 삶의 현장과 멀어지면 안 된다. 구호 행정은 기자가 현장에 가보지 않고 쓰는 기사처럼 울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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