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나도 틀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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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준 세종대 대양휴머니티칼리지 초빙교수·교목

학생들과 토론수업을 진행할 때의 일이다. 한 학생이 자신이 조사한 통계를 갖고 기업의 사업 다각화에 대해 찬성 입장을 밝혔다. 이에 다른 학생이 그 기업은 중소기업을 잠식하는 형태이기에 반대 입장을 피력했다. 찬반 논의가 격렬해 진행하는 교수로서 진땀을 빼기도 했다. 때때로 우리는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는 ‘아시타비(我是他非)’의 명제에 갇혀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지속되면서 전 세계가 오랜 시간 진통을 겪고 있다. 러시아는 자신들이 옳고 우크라이나와 서방이 틀렸다고 생각할 것인데, 우크라이나와 서방도 러시아에 대해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국의 정치권에서는 어려운 시기 민생을 살펴야 할 정치인들이 자신만 옳다고 주장하면서 분열을 일삼는 탓에 국민들의 피로도가 상당하다. 누구든지 보는 관점과 상황에 따라 옳고 그름이 나뉠 수 있는데 항상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가 우리의 생각과 삶을 지배한다. 비슷한 의미를 지닌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의미의 ‘내로남불’이란 용어가 사전에도 등재되지 않았는가.

 

고린도전서에는 고린도 교회의 분열이 나타나 있다. 고린도에 있는 신앙공동체는 왜 분쟁이 있었을까? 대표적으로 유대 기독교와 헬라 기독교와의 분리다. 바울은 예수의 동생인 야고보와 베드로가 중심으로 활동하던 예루살렘 교회와의 신앙적인 갈등으로 결국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나서게 됐다. 고린도 교회도 마찬가지다. 거기에도 분파가 생겼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로 나뉘었다(고전 1:12).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가에 따라서 파가 나뉘었고, 자신들이 속한 분파만이 옳고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쓴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런 분리와 분파주의를 경계하기 위한 것이었다.

 

국제 정세와 국내 정치권의 상황은 자국과 정당의 이익이 우선하는 영역이니 차치하더라도 우리의 일상에까지 ‘아시타비’와 ‘내로남불’의 문법이 가득하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감염을 염려해 타인과 거리를 두고 거부하는 문법, 빈부격차의 심화로 등장한 수저계급론과 갖가지 논쟁의 문법,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인정하지 못하고 배척하는 문법, 남녀·세대·노사·지역 간의 갈등과 충돌의 문법들이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다.

 

나만 맞고, 나와 같은 동질성을 가진 사람들만 옳다는 ‘아시타비’의 생각과 행동은 동질성의 폭력을 야기한다. 나와 생각 및 입장이 다른 사람의 특이성과 차이성, 고유성과 다름은 수용과 인정을 받지 못하고 거절과 분리, 심하게는 차별과 혐오에까지 이르게 된다.

 

‘아시타비’의 그릇된 문법을 바로잡을 수 있는 대안은 “나도 틀릴 수 있다”는 명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철학자 니체는 미래의 이상적인 인간을 ‘위버맨쉬(Übermensch·초인)’라고 불렀다. ‘위버(Über)’는 ‘위’ 또는 ‘넘어서’를, ‘멘쉬(mensch)’는 ‘사람’을 뜻한다. 즉, ‘인간을 넘어선 인간’이며 모든 관습과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정신을 갖춘 존재이고, 편견에서 벗어나 세상을 넓은 시야로 바라볼 수 있는 존재다. 이와 반대 개념인 ‘인간말종’을 언급하는데 자신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없는 시시한 존재, ‘자기 자신을 경멸할 수 없는 존재’다. 이는 자신에 대해 깊은 성찰과 회의를 하지 못하기에 자기 극복을 통한 발전도 결코 있을 수 없다. 니체는 이런 인간말종을 천민, 다수, 짐승 떼 등으로 불렀다.

인간은 이러한 인간말종과 위버멘쉬 사이에 존재한다. 때때로 나 자신을 경멸하면서 “내가 틀릴 수 있고, 네가 옳을 수 있다”는 겸허한 성찰과 행동을 통해 위버멘쉬로의 도약이 절실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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