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검정고무신’의 비극

이연섭 논설위원 yslee@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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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고무신’은 1960년대 서울을 배경으로 초등학생 기영이, 중학생 기철이와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코믹하게 그린 만화다. 이우영·이우진 작가가 그림을 그리고, 이영일 작가가 글을 썼다. 1992년부터 2006년까지 소년 챔프에 연재해 최장수 연재 기록을 세웠고, 45권짜리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애니메이션도 제작됐으며, 캐릭터 사업으로도 이어졌다.

 

‘검정고무신’이 국민적 인기를 끌며 호황을 누렸으나 만화가는 행복하지 않았다. 15년 전 사업화를 제안하는 회사만 믿고 맺은 불공정 계약으로, 원작자인데도 저작권 침해로 고소당해 고통받다가 이우영 작가(51)가 세상을 등졌다. 원작자임에도 ‘검정고무신’ 캐릭터를 자신의 다른 작품에 등장시켰다는 이유로, 부모님 농장에서 ‘검정고무신’을 상영했다는 이유로 고소당했다.

 

이 작가는 지난 11일 강화군 자택에서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몇 년째 저작권 소송으로 고통에 시달리며 피폐해졌다. ‘이우영 작가 사건 대책위원회’에 따르면 “회사가 77개 부가사업을 벌이는 동안 작가가 수익 배분받은 돈은 1천200만원 정도”였다. 회사는 1960, 70년대 원작 배경을 현재로 바꿔 새 버전을 내고 싶다는 작가의 창작 의지도 꺾어 버렸다. 이 작가는 죽기 며칠 전 아내에게 “사람이 죽어야 이슈가 될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작가들의 불공정 계약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22 웹툰 사업체, 작가, 불공정 계약 실태조사’를 보면 웹툰작가의 약 60%가 불공정 행위를 경험했다고 한다. 이우영 작가의 안타까운 죽음 직후 문화체육관광부는 불공정 계약을 막겠다며 법률지원센터 구축 태스크포스(TF)를 발족했다.

 

공정위는 9년 전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한 그림책 ‘구름빵’ 작가 백희나씨가 1천850만원밖에 보상받지 못한 게 논란이 되자 출판계의 불공정 약관을 시정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작가의 예술혼과 창작열을 짓밟는 시스템은 시정되지 않았다. 예술노동자들의 안정적 생활과 창작을 위한 사회보장제도 및 노동권 확립, 저작권 불공정 관행 등 해결 과제가 많다. 입법을 포함한 종합적이고 구체적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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