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용서 받지 못할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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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준 세종대 대양휴머니티칼리지 초빙교수 및 교목

교양수업 독서토론 시간에 ‘피의자 신상공개’를 논제로 선정하고 긍정과 부정의 의견을 주고받았다. 찬성 측은 국민의 알 권리, 보복 범죄와 재범률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했고, 반대 측은 신상 공개의 기준이 모호하고 낙인찍기에 의해 사회 복귀의 어려움을 제시했다. 결론은 사건마다 다르고 나름의 스토리가 있으니 국민의 알 권리 및 공공의 이익과 교화를 통한 사회 복귀 및 인권 중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아야 함에 동의했다. 학생들의 성숙한 토론문화와 함께 논쟁에서 언급된 ‘용서 받지 못할 자’가 기억에 남는다.

 

‘용서 받지 못할 자’가 하루가 멀다 하고 등장한다. 나영이를 폭행한 조두순, N번방 사건의 조주빈, 갑질 폭행을 일삼은 양진호, 제주도 펜션에서 전 남편을 살해하고 시신을 토막 낸 고유정, 부산 돌려차기 남자, 과외 교사를 구한다며 중학생으로 위장해 살인을 저지른 정유정, 수많은 학교폭력 가해자들을 향한 사회적 공분이 치솟아 신상공개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회자되고 있는 형국이다.

 

프랑스의 유대인 철학자 장켈레비치는 ‘우리가 그들을 용서해야 하는가’라는 유명한 글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피해자들에게 가해자들(나치 정권)을 용서하라는 요구가 고조되자 매우 분노하면서 “용서란 나치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었다”고 선언한다. 장켈레비치는 살해자들이 용서 받기를 원한다면 먼저 그들이 가스실에서 죽인 어린이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사회·정치적 공간에서 하나의 ‘수단’으로 쓰이는 ‘용서의 오용’을 비판한다.

 

반면 철학자 데리다는 ‘용서의 정치’만을 다루는 데서 ‘용서의 윤리’로 넘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용서 받을 수 없는 ‘치명적 죄’를 용서할 때 비로소 진정한 ‘용서’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용서를 ‘밤’에 비유하면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은밀히 행하라”는 예수의 말과 맥락을 같이한다.

 

이처럼 조건적인 용서(용서의 정치)와 무조건적인 용서(용서의 윤리), 두 축은 인간의 현실 세계에서 매우 중요하기에 이분법적 분리나 한쪽의 환원은 곤란하며 끊임없는 협상이 필요하다.

 

호손의 소설 ‘주홍글씨’에 등장하는 주인공 해스터 프린은 네덜란드에서 미국 보스턴으로 이주해 온다. 곧 뒤따라 오겠다던 남편은 2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고, 외로운 그녀 앞에 딤스데일이라는 젊은 목사가 나타나 둘은 사랑에 빠져 사생아를 낳게 된다. 간음한 여인이라 손가락질을 받고, 가슴에 A(Adultery·간음한 여자)를 새긴 채 살아야 하는 가혹한 처벌을 받는다. 감옥에서 나온 그녀는 사람들의 비난을 뒤로한 채 자신처럼 죄를 짓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도움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가서 헌신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지고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그녀를 용서한다. 이제 그녀 가슴의 주홍글씨 A는 능력 있는 여자(Able), 존경받을 만한 여자(Admirable), 천사 같은 여자(Angel)로 변해 있었다. 호손은 타인을 낙인찍는 일과 더불어 낙인을 극복하는 법을 말하고 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누가복음 17:3). 도저히 용서 받지 못할 자를 교화하는 힘, 그 또한 ‘용서’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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