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정국에서 대선정국으로 급변 계엄과 정치가 융합한 최악 분열 尹, 결자해지 할 ‘최후 명령’ 남았다
현실 정치에서 저만치 떨어져 지낸다. 정치도 여론도 그를 잊어가고 있다. 그런 그에게도 12월3일 밤은 충격이었다.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대통령 윤석열’. 지인들과의 술자리를 중단하고 일어섰다. 급한 마음에 국회로 차를 몰았다. 바리케이드가 쳐지고 있었다. 다시 용산으로 차를 돌렸다.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다시 돌려 왔지만 역시 조용했다. 그렇게 대통령실 앞을 세 번 오갔다. 그가 말했다. “큰일났다. 통합해야 한다.”
다들 그랬다. 처음에는 공포였다. ‘계엄 선포’, ‘계엄군 통제’, ‘영장 없이 체포’, ‘위반 시 처단’…. 기자들에게는 ‘언론 출판 계엄군 통제’까지. 3시간만에 국회가 계엄 해제 결의를 했다. 계엄군이 고개를 숙이며 돌아갔다. 시민들의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심장 박동을 두드리던 공포는 누그러졌다. 대신 그 빈자리에 분노가 채워졌다. 윤석열 대통령을 향한 분노였다. 밝아 온 12월4일 구호는 이미 정해졌다. ‘윤석열 탄핵’, ‘윤석열 처벌’.
이때까지는 ‘안쓰러운 이해’도 있었다. 비상 계엄 선포의 이유를 두둔하는 논리였다. 여당인 국민의힘에서 나왔다. 김민전 최고위원이 ‘야권의 무도함을 알리지 못한 점을 반성한다’고 말했다. 울먹였다. 인요한 최고위원은 ‘야당이 대통령과 대통령 가족에게 몰아붙인 점을 기억하자’고 했다. ‘정치가 아닌 의사로서의 소견’이라고 했다. 20% 미만 지지층의 측은지심도 있었다. ‘오죽했으면 그랬겠나’는 동정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러나 이런 배려도 한순간 사그라들었다. ‘국회 무력화 기도’다. 계엄군의 첫 번째 작전은 국회 점거였다. 계엄하에서도 국회 탄압은 안 된다. 이 자체가 계엄법 위반 행위다. 여기서 더 나간 주장도 나왔다. 중요 정치인에 대한 체포 시도 주장이다. 그 속에 놀라운 대상도 포함돼 있었다. 정부와 한 몸인 여당의 한동훈 대표다. ‘무도한 야당의 횡포’가 계엄의 사유라고 했다. 그런데 같은 여당의 대표를 체포하려 했다. 말이 되나.
체포 지시가 있었네 없었네 말은 많다. 하지만 한 대표를 체포하려 했던 것은 사실이다. 한 대표도 윤 대통령에게 직접 항의했다. 돌아온 답은 ‘그랬다면 계엄군이 포고령 위반 때문에 그랬을 것’이었다. 국민의힘에서도 반발이 나왔다. 윤 대통령을 옹호하는 정치 목소리는 사라졌다. 조기 퇴진을 위한 로드맵이 공식 화두가 됐다. 7일 국회가 탄핵을 의결했다. 불발됐지만 또 한다고 한다. 탄핵 또 탄핵…. 정권은 이미 무력화됐다.
그날, 모두가 봤다. 국민이 둘로 갈라졌다. 국회에 온 국민은 탄핵 찬성을 외쳤다. 광화문에 온 국민은 탄핵 반대를 외쳤다. 탄핵 좌절에 눈물을 흘리는 국민이 있었다. 탄핵을 항의하며 몸에 불 붙인 국민이 있었다. ‘12·3 계엄’이 잘못됐음은 모두가 안다. 위법성과 무모함을 토론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국민은 둘로 갈라졌다. 이 이유를 설명하는 건 어렵지 않다. 계엄 정국이 다른 곳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대선(大選)의 셈법이다.
‘탄핵 찬성’. ‘이제 대통령은 이재명이다’는 목소리가 있다. ‘탄핵 반대’. ‘죽어도 이재명에겐 줄 수 없다’는 목소리가 있다. 계엄 정국에 더해진 대선 전초전. 경험 못한 분열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서두(序頭)의 화자는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다. 의원, 장관, 지사, 당 대표를 했던 그다. 무력하게 헤맸다는 3일 밤 광화문 거리다. 그의 우려가 사흘 만에 현실이 되고 있다. ‘국민 분열이 걱정이다. 통합해야 한다.’ 숱하게 들었던 ‘통합’. 지금처럼 무거웠던 적이 없다. 윤 대통령은 임기를 정치권에 맡겼다. 많이 남은 것 같지는 않다. 그런 그에게도 마지막 명령권은 있다. 이 혼란을 초래한 계엄에 속죄할 명령, 그 자신을 향한 명령이다.
‘국민 통합의 밀알이 되겠습니다.’ 그 내용·방식은 정해져 있다. 국민도 알고, 대통령도 안다. 그걸 그가 하면 된다.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