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빛수원] 수원특례시, 김노적·이현경 등 지역 항일 활동가 7명 포상 신청

지난 2019년 3·1운동 100주년 기념 시민문화제에서 수원시민들이 방화수류정에서의 만세운동을 재현하고 있다. 수원시 제공
지난 2019년 3·1운동 100주년 기념 시민문화제에서 수원시민들이 방화수류정에서의 만세운동을 재현하고 있다. 수원시 제공

 

뜨거웠던 수원 지역 만세운동의 중심에 있던 인물 ‘김노적’과 국내외에서 항일 활동을 펼친 ‘이현경’은 아직 국가의 포상을 받지 못한 수원의 대표 항일 인물이다. 수원시 박물관사업소는 최근 김노적과 이현경을 포함해 총 7명의 수원 출신 독립운동가에 대한 포상을 국가보훈부에 신청했다. 후손이 없거나 증거 자료가 부족해 서훈을 받지 못한 인물의 공로를 인정받아 그 희생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부족한 자료와 사라진 행적을 보강해 포상 신청

 

구체적 자료가 부족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인물의 대표적인 수원의 독립 인물로는 김노적과 이현경이 있다.

김노적(1895~1963)은 수원면 산루리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수원중고등학교인 수원상업강습소를 나왔는데 당시 소장(교장) 겸 소감(교감)이 수원의 대표 독립운동가 김세환이었다. 은사와 제자로 만난 이들은 1919년 만세 운동을 수원에서도 일으키기로 했고, 김세환은 김노적을 만세운동 인원 동원 책임자로 임명했다. 하지만 만세운동 계획이 발각됐다는 정보에 따라 시위는 방화수류정에서의 야간 횃불시위로 대체됐다. 이때 주도자로 체포된 김노적은 심한 고문과 구타를 불구가 됐지만 수원의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수원학생친목회를 조직, 활동을 이어갔다. 졸업 후에는 신간회 수원지회 창립회장으로 사회운동을 이끌었다. 1941년 일제의 탄압이 심해져 교직을 그만둔 뒤 중국으로 떠났다가 1945년 해방 뒤 귀국해 10여년간 투병생활 끝에 1963년 사망했다.

 

이현경(1899~미상)은 ‘수원의 유관순’으로 불리는 이선경의 언니이다. 1899년 4월 수원면 산루리에서 태어나 수원사립진명여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동경으로 유학을 떠난 그는 3·1운동 2주기였던 1921년 3월1일 동경 히비야공원에서 140여명의 유학생과 만세운동을 펼쳐 주동자 중 한 명으로 체포됐다. 그 후에도 약 11년간 일본에서 삼월회 등 여성운동 단체 활동을 했고 귀국 후에는 조선여성동우회에 가입,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며 근우회 활동에 주력했다. 이후 일제 탄압을 피해 남편과 중국으로 망명, 1930년대 초까지 김원봉과 함께 북경에서 활동한 흔적이 남았다. 하지만 이후 행적은 물론 생사 조차 확인되지 않아 공적을 인정받지 못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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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수원시가 포상을 신청한 (왼쪽부터)김노적, 이현경. 수원시 제공

 

◇5명의 수원 출신 독립운동가 흔적 발굴

 

수원시가 광복 80주년인 2025년 추가로 포상을 신청한 독립운동가들은 독립 및 민족 운동을 하다 체포, 판결문이 남아 있어 공적 확인의 근거 자료를 확인할 수 있는 인물들이다.

 

문용배(1916~미상)는 수원군 성호면 오산리 출신이다. 용산 공작소에서 일하던 중 조선공산당재건운동(경성콤그룹) 사건으로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1937년 5월 수감, 약 2년여의 옥고를 치른 뒤 1939년 4월 14일 출감했다.

 

윤경의(1893~미상)는 수원군 서신면 매화리 출신으로 농업에 종사하던 인물이다. 그러나 1937년 전시 체제기 일본군이 진다는 소문을 퍼트렸다는 이유로 금고 6월을 선고받았다.

 

임학수(1923~미상)는 수원군 반월면 출신이다. 경기중학교 학생이던 1940년 사회주의 활동을 하면서 조선인해방동맹을 조직, 징역 2년 이상을 선고받았다.

 

정재억(1910~미상)은 수원군 송산면 지화리가 본적이다. 전남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에 다니며 일제 반대 동맹을 조직했다. 1928년 선후배 학생들과 민족차별교육·식민지노예교육에 반대하다가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최병두(1925~미상)는 수원군 음덕면 남양리 출신이다. 1941년 서울의 일본고주파중공업주식회사에 취직하려다 일본인과 조선인을 차별하는 것에 반발, 회사 변소에 ‘천황은 빠가야로우(바보같은 놈)’라는 낙서를 해 징역 2년을 받았다.

 

지난 2018년 3월 독립운동 인물 발굴사업 최종보고회에서 참석자들이 토론을 하고 있다. 수원시 제공
지난 2018년 3월 독립운동 인물 발굴사업 최종보고회에서 참석자들이 토론을 하고 있다. 수원시 제공

 

◇수원의 독립 인물 찾기 ‘잊지 않는 수원’

 

수원시는 수원 출신 또는 수원에서 독립운동이나 항일운동을 한 인물을 발굴하고 그들의 흔적을 찾아내 그에 합당한 예우를 받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 현재까지 수원시의 지원으로 포상을 받은 독립운동가는 13명에 달한다. 사라질 뻔했던 수원의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지킨 것이다.

 

2008년 개관한 수원박물관은 수원의 독립운동가 발굴의 중심축이다. 첫 결실은 2009년 기생들의 만세운동을 이끈 김향화가 대통령표창을 받은 것이었다. 이어 2012년에는 이선경의 독립운동 행적과 순국 사실을 확인해 애국장 포상을 이끌었다. 이와 함께 특별기획전과 학술대회를 열어 숨겨졌던 독립운동가들의 공로를 널리 알리기도 했다.

 

특히 독립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있던 2017년에는 ‘독립운동 인물 발굴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수원학연구센터와 함께 전문 조사를 거쳐 지역 독립운동가 113명을 추가로 발굴했다.이를 토대로 2019년 15명의 포상을 신청해 9명이 업적을 인정받았고, 2022년에도 7명의 포상을 신청해 지난해 2명이 추가로 서훈을 받았다.

 

2024년 애족장을 받은 홍영유. 수원시 제공
2024년 애족장을 받은 홍영유. 수원시 제공

 

◇홍영유, 학생 독립 정신 깨우는 격문 배포

 

지난해 애족장을 받은 홍영유는 1911년 1월 수원 서신면 전곡리에서 태어났다.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3년 반제·반전 격문을 배포한 혐의로 체포됐다. 그는 학생들과 독서회를 조직해 일제 식민지배에 항거하려 했고 권우성과 ‘노동자농민과 근로학생제군’이라는 격문을 작성, 450여매를 인쇄해 2월5일 밤 학교에 배포했다. 함께 격문을 만들고 배포한 동지들과 치안유지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져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2024년 대통령표창을 받은 한인택. 수원시 제공
2024년 대통령표창을 받은 한인택. 수원시 제공

 

◇한인택, 항일 의지 전파하고 투쟁하며 민족의식 고취

 

지난해 대통령표창을 받은 한인택은 1913년 4월 수원면 남창리에서 태어났다. 1932년 경성농업학교에 재학 중 비밀결사 활동을 하며 독립 의지를 떨쳤다. 당시 한인택은 독서회로 포장한 ‘소척대’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 민족주의 사상을 공부하며 비밀출판물 ‘소척’을 발행해 항일 사상을 전파하고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총 18명이 가담한 모임에서 그는 병사부장을 맡아 투쟁을 총괄했다. 이후 체포된 그에게 검사는 징역 1년형을 구형했지만, 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받으며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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