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대] 영케어러 이야기

허행윤 지역사회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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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핍한 젊은이가 어머니 병시중을 들었다. 어느 날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살해한다. 러시아의 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장편소설 ‘죄와 벌’의 첫 장면이다.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요즘 버전으로 표현하면 영케어러(가족돌봄 청년)였다. 또 다른 의미의 그림자 가장인 셈이다.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그의 눈에 비친 고리대금업자 노파는 절대악이었다. 살인 후 죄책감과 자기합리화 사이에서 갈등했다. 이후 연인인 소냐의 도움과 충고 등으로 고민하다 당국에 자수했다. 그리고 시베리아 유배지에서 사회와 격리된 채 속죄의 길을 걸었다. 그는 그렇게 사회 밖으로 사라졌다.

 

어린 나이에 병든 부모를 모셔야 하는 청년들은 사회에 대한 시각이 삐뚤어질 수밖에 없다. 라스콜니코프처럼 말이다. 또래 청년들에 비해 경쟁에서도 제외된다. 이런 젊은이들을 치유해야 하는 사회적 비용도 만만찮다. 곧 국가의 손실로 이어진다. 불공정의 대표적인 사례다.

 

최근 이 같은 현실을 반영하는 우울한 보고서가 나왔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영케어러는 일반 청년에 비해 ‘여건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의료’(미충족 의료)를 경험할 가능성이 최대 5배(경기일보 10일자 1면)인 것으로 나타났다. 19~34세 1만4천966명을 가족돌봄 청년인 그룹과 아닌 그룹으로 나누고 이들의 의료 경험 가능성 등을 비교·분석한 결과다.

 

영케어러는 일반 청년에 비해 대학 진학률도 낮았다. 교육 수준이 고교 이하인 경우가 가족돌봄 청년은 30.49%이었으나 일반 청년은 13.83%였다. 대학 재학 혹은 자퇴 등은 가족돌봄 청년은 19.51%, 일반 청년은 31.70%로 나타났다. 이들의 46.4%는 최근 1년간 번아웃을 경험한 적이 있었지만 일반 청년은 32.46%에 그친 것으로 집계됐다.

 

라스콜니코프 같은 청년은 2세기 전 러시아에서만 있었을까. 우리 사회도 극복해야 숙제들이 차고 넘친다. 영케어러 문제도 그중 하나다. 그렇지 않으면 제2, 제3의 라스콜니코프만 양산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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