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만에 대설이 내려 겨울 가뭄이 해갈됐다. 눈(雪)은 우리의 생활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예부터 많은 기록이 남아 있다. 삼국시대의 강설량 측정은 길이의 단위인 자(尺)를 사용했으며 눈(雪)·대설(大雪)로 나누어 구별하였다. 특히 눈이 없었던 겨울의 무설(無雪)의 기록이 13회나 되며, 철에 맞지 않는 눈·대설의 기록도 있다. 철이 이른 가을철의 눈과 대설에 대한 기록은 3회, 철이 늦은 봄철의 눈·대설은 7회의 기록을 보이고 있다. 더욱이 초여름의 눈이나 여름철의 눈은 이변(異變)으로 볼수 있는데 이에 대한 기록으로는 신라 벌휴이사금 9년(192년) 음력 4월 초여름 경도(京都)에 석자의 눈이 내렸고, 신문왕 3년(683년) 음력 4월 여름에 한자의 눈이 내렸으며, 신라 헌덕왕 7년(815년) 음력 5월 여름에 눈이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대설, 폭설에 관한 기록 중에는 ▲조선조 태종 9년(1409년) 4월21일 “영흥부(永興府)에 석자나 되는 눈이 내려 나뭇가지가 눌려 꺾어졌다.” ▲세종 3년(1422년) 2월6일 “제주에는 기르는 말이 1만마리가 넘는다. 이전까지 이 섬은 따뜻한 곳이어서 겨울에 적설이 없었다. 그런데 금년은 추위가 매우 심하고 눈이 5∼6자나 쌓여 많은 말이 얼어 죽었다.” ▲단종 1년(1453년) 1월29일 “큰눈이 내려서 3∼4자나 쌓이는 까닭에 새나 짐승들이 굶주려서 집 안으로 들어 왔다.” ▲중종 20년(1526년) 1월24일 “길주(吉州)·명천(明川)·경성(鏡城) 등지에 12월3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큰 눈이 내려 평지의 눈 깊이는 4∼5자에 달하였고 밤중에는 광풍이 불어 해수가 밀려와 바닷가의 인가가 물에 잠겨 집을 비우고 도망가거나 눈속에 빠져 동사하는 자가 대단히 많았다”고 한다.
1924년 만석꾼의 사재를 투자하여 ‘조선문단’이라는 순문예지를 창간, 이광수(李光洙)로 하여금 주재케하여 한국신문학 발전과 민족주의 옹호에 힘쓰며 ‘인생극장’‘마도의 향불’ 등 많은 명작을 발표했으면서도 말년에 대중작가라고 하여 문단에서 외면당한 방인근(方仁根·1899∼1975) 선생이 생전에 서울 근처 송추의 회음자리에서 “지금 계룡산에 대설이 내리고 있다. 나는 그곳에 가야겠다”고 한 옛일이 생각난다. 동석했던 지지대子는 그때 취중언행으로 생각했었는데 여름에도 눈이 내린 것은 문인의 마음속에서만은 아닌 모양이다. 옛날이긴 하지만 여름에도 대설이 내렸다니 자연의 조화는 경외스럽다.
/淸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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