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론

‘능서불택지필’(能書不擇紙筆)이라고 했다. 글씨 잘 쓰는 사람은 종이나 붓타박을 않는다는 뜻이다. 서양속담에도 ‘서투른 목수가 연장만 나무란다’는 말이 있다. 당나라의 명필가로 저수량, 우세남, 구양순이 있었다. 어느날 저수량이 우세남을 찾아가 자신과 구양순을 비교해 물었다. 우세남은 “그대와 나는 붓과 종이를 가려서 글씨를 쓰지만 구양순은 붓과 종이를 가리지 않고 글씨를 쓰니 어찌 그와 비유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우세남은 자신을 아는 사람이었고 저수량은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개헌론이 모락모락 연기를 피운다. 김중권민주당대표에 이어 한화갑최고위원이 대통령 4년 중임제, 정부통령제 개헌을 주장하고 나섰다. 4년 중임제도 해봤고 정부통령제도 이미 해봤다. 4년 중임은 촉박하게 겹치는 대통령선거가 미국 정치토양과 다름으로써 빚는 지나친 폐단으로 인해 1980년 10월 7차 개헌에 의해 5년 단임제가 됐다. 이승만, 박정희대통령의 3선 개헌 장기집권에 질려 단임제를 채택한 면도 없지 않다. 이 헌법에 의해 전두환정권의 5공이 생겼고 6공은 1987년 10월 직선제를 골자로 한 8차 개헌에 의해 노태우정권부터 시작해서 지금에 이른다.

부통령은 이시영 초대부통령이 ‘하는 일 없이 국록만 축낸다’는 뜻으로 ‘시위소찬(尸位素餐)의 자리’란 유명한 말을 남기고 자진 사퇴했다. 이승만대통령시절엔 야당출신의 장면부통령이 고령의 이승만 유고시 대통령직을 승계할 것이 두려워 장부통령의 권총암살을 기도, 손바닥을 관통시키는 부상을 입혔다. 이밖에 4·19 의거후 제2공화국시절에는 참의원(상원), 민의원(하원)의 국회 양원제도 해보았다.

현행 5년 단임제, 부통령제 배제가 절대적으로 좋은 정치 제도라고는 물론 말할순 없다. 그러나 어떤 정치제도든 장·단점이란게 다 있다. 요체는 운용의 묘에 있다. 여권의 개헌론배경이 상대적 장기집권(5년 단임보단 8년 중임), 그리고 정부통령후보의 지역안배로 지역감정에 의한 득표공작에 있는 것으로 보는 관점이 맞다면 동기부터가 순수치 않다.

개선 명분으로 단임제가 조기 레임덕을 말하는 것은 한낱 구실에 불과하다. 정치를 잘하는 사람은 글씨를 잘 쓰는 선비가 붓타박을 않는 것처럼 헌법을 탓하지 않을 것이다. 경제가 어렵고 민생이 도탄인 지경에 개헌을 입에 담을 때가 아니다. 지필묵을 가리는 저수량처럼 자신을 모르는 위인들이다.

/白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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