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희 여기자상

근대 격동기의 여기자로 눈부신 활약을 보인 추계(秋溪) 최은희(崔恩喜)여사, 그가 조선일보에 입사한 것은 1924년 일본여자대학 사회사업학부 3학년 때였다. 학예부, 사회부, 정치부기자를 거쳐 학예부장까지 지내면서 필명을 떨쳤다. 민족계몽의 기자정신이 투철했던 최은희기자는 어려운 동포들 돕기에 앞장서기도 했다.

경기여자고등보통학교(경기여고)시절 일어난 3·1만세 독립운동땐 열여섯의 나이에 참가, 일경에 체포돼 두차례나 옥고를 치렀다. 일제때인 1927년 신간회 자매단체 근우회를 시작으로 광복후 1960년대말까지 여성운동을 주도한 선각자였다. 한국여성운동의 사료를 집대성한 ‘조국을 찾기까지’(상·중·하권), ‘근역의 방향’, ‘씨뿌리는 여성’, 여성전진 70년’등 지칠줄 모른 저서활동으로 역작을 남겼다.

‘최은희여기자상’이 제정된 것은 1984년 8월 17일 81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하기 1년전 병상의 유언에 의해서다. “후배 여기자들을 위해 써달라”며 평생모은 당시로써는 거액인 5천만원을 자신이 몸담았던 조선일보사에 기탁했다. ‘최은희 여기자상’의 기금이된 이돈은 이불자락을 씻을때 뽑은 실밥을 다시 썼을만큼 근검절약으로 모은 원고료 였다고 한다. 외면보다는 내실을 기해 평생 사치를 몰랐던 분이다.

조선일보사내에 있는 ‘최은희여기자상 관리위원회’가 지난 1984년 첫시상이래 열여덟번째가 되는 올 수상자 후보를 오는 31일까지 공모한다. 명실공히 국내 여기자상의 최고 권위를 지닌 이 상은 일간신문, 방송, 통신사에서 발군의 활약을 보이는 여기자들을 대상으로 한다. 수상자는 약420만원의 상금과 순금메달외에 도자기, 자전거, 램프세트, 상해보험증권 등 푸짐한 부상이 주어진다.

역대 수상자 가운데는 지방언론사 여기자도 두명이 있다. 여기자가 늘어가는 것은 좋은 현상이다. 좀더 아쉬운 것은 평생직업의 프로의식이 요구되는 점이다. 앞으로 지방사 수상자가 더 많이 나올 수 있는 후배 여기자들의 왕성한 성장을 기대하고 싶다.

수원대학교 금융공과대학원장으로 있는 이달순박사가 최은희여사의 맏아들이다.

/白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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