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이 양녕대군을 폐세자 하려하자 황희는 ‘나라의 근본을 바꾸는 것은 부당하다’고 적극 주청,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태종은 마침내 황희를 귀양보냈다. 폐세자를 반대하는 것은 새로 세자가 되어 다음 왕이 될 사람을 반대하는 것이어서 당장 귀양가는것은 차치하고 후일의 목숨을 거는 것이었다. 황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태종은 충녕대군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한 뒤에 비로소 황희의 귀양을 풀어 조정에 사사토록 했다. 황희는 태종밑에서 18년을 봉직했다. 태종이 세상을 떠나 충녕대군(세종)이 왕위에 오르고도 황희는 세종밑에서 27년을 일했다. 영의정만 해도 18년을 지냈다. 세종은 황희가 일찍이 양녕대군의 폐세자를 반대한 것은 원칙을 논한것 이어서 마땅하다고 보아 조금도 개의치 않았던 것이다. 세종재위 31년동안에 조선조 초기의 황금시대를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세종같은 현군에 황희같은 충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조 중기의 명신 정철은 자신에 대한 정적의 탄핵내용이 (모함이 아닌)허물을 지적한 것이면 솔직히 시인하는 용기를 가진 거유였다. 한번은 측근이 흥분하는 것을 보고 “아니야, 그사람(정적)과 술잔이라도 나누고 싶구먼!”하고 말한 것으로 전한다. 원칙과 소신에 자신의 이해관계를 초월한 선인들의 이같은 얘기는 원칙과 소신보다 권력의 눈치 살피기에 급급한 현대인들에게 일깨워 주는 의미가 크다.
단소리엔 귀를 솔깃이 기울이고 쓴소리에는 애써 귀를 막는 권력자들은 더욱더 귀담아 들어야 한다. 단소리라고 다 단것이 아니고 쓴소리라 하여 다 쓴것이 아닌데도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는 속담대로 단소리에 귀가 솔깃한 것은 인지상정이긴 하다. 그러나 범부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벼슬하는 이들은 범부와 달라야 한다. 왜냐하면 쓴소리속엔 약이 되는 말이 있어도 단소리엔 약이 되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또 아첨꾼은 단소린 할줄 알아도 쓴소린 할줄 모르기 때문이다. 권력의 주변은 이래서 예나 지금이나 몸 가짐이 어렵다.
/白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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