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

일본이 역사교과서를 왜곡했을 때 정부는 일본과 외교 관계를 단절할 듯 몰아세웠다. 김대중 대통령조차 역사 왜곡을 시정하지 않는다면 일본을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끝까지 시정을 요구하겠다”며 강하게 비난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들도 “일본이 앞으로 두고 두고 후회하고 뉘우치게 될 것”이라고 발언했다. 7월12일에는 대일 문화개방을 중단했다.

그런데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잠시 한국을 다녀간 뒤 대일 문화개방 중단, 군사협력 중단 등 대일 보복조치를 단계적으로 철회키로 했다고 한다. 10월16일 있은 한일정상회담이 양국관계 정상화의 계기를 마련했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거듭 하는 이야기지만 고이즈미의 한국방문이 경색된 양국 관계를 복원하는데는 실패했다. 짧은 일정도 문제였거니와 양국간에 존재하는 역사인식의 차이가 너무 현저하기 때문이다.

합의문은 커녕 공동언론 발표문 하나 마련하지 못한채 각자의 기자회견으로 그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 이를 잘 말해 준다. 과거사에 대한 레토릭부터가 맘에 안든다. 고이즈미는 서대문 독립공원을 방문한 자리에서 “과거 일본이 한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준 데 반성하고 사과한다”고 말했다. 이런 정도의 사과는 일본인이라면 누구든지 형식적으로 할 수 있는 표현이다. 그는 “외국으로부터의 침략”, “서로 반성”운운하면서 과거사에 대한 책임을 교묘하게 희석시켰다. 역사교과서 문제만 해도 그렇다. 양국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공동연구기구’의 설치를 제의했다지만 이것 역시 그냥 인사 겸 한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서울 나들이’에 지나지 않은 고이즈미가 다녀가자

마자 대일 보복조치의 하나로 연기한 제9차 한일 문화교류 국장급 회의를 조만간 개최하고 11월중에는 한일 영사국장 회의도 열 계획이라고 한다.

내년에 있을 월드컵 공동개최 등 아무튼 일본과는 만나지 않을 수는 없지만, 성급한 한·일 문화교류 재개는 좀 체신머리가 없는 것 같아 개운치 못하다. 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일본, 미국을 짝사랑만 하고 있는지 답답하다.

/淸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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