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想

니가 잘났어? 잘 났으면 얼마나 잘났나! 위선, 독선, 아집, 교만, 가식, 어슬픈 지식, 이런 것들이 빠지고 나면 뭐가 남는가. 아첨과 비굴, 허욕, 그리고 종족적 본능만이 가득찬 썩은 영혼의 육신뿐인 것을. 가을이 짙은 하늘과 산하를 보며 이를 생각하는 것은 대자연 속의 자아가 너무 크기도 하고 너무 작게도 보이는 혼란 때문이다. 은행나무 가로수가 조용히

떨어뜨리는 노랑 단풍잎 하나보다 못한 것 같기도 하고, 감히 높푸른 창공을 두손 들어 거머쥐고 싶을 만큼 커보이는 실존의 착각에 잠기곤 하는 것이다.

어차피 나는 나인 것을. 이름없는 가을 들꽃보다 못한 심성을 국화처럼 아름답게 꾸며 보이길 좋아하고, 한낱 아카시아 바늘에 찔려도 견디기 힘든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볼품 없는 살을 대단하게 여기며 살 수 밖에 없는 군상에 불과하다. 제비가 간다고 너무 섭섭해 할게 없는 것은 봄에 또 오기 때문이며, 기러기가 온다고 너무 반길게 아닌 것은 봄에 또 가기 때문이다. 오고 가고 나타나고 사라지는 이치는 곧 영겁의 생명인 것이다.

무한 영겁, 무한 광대한 우주의 시공 가운데서 티끌같은 자아가 있는건 그래도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면 그게 뭣인가를 알아야 할 것 같다. 온실의 화초가 갖는 구실과 서릿발에 퇴색하면서도 생명력을 잃지않는 잡초의 구실이 다르긴 하다. 인간의 삶 역시 비록 서로 구실이 달라도 어떤 구실이든 서로 필요치 않는게 없다. 상대를 부정하는 것은 결국 나를 부정하는 것으로, 상대를 인정하는 가운데서 내가 인정되는데도 어리석게 상대를 부정하려 든다.

가을의 결실은 조화다. 봄 여름의 햇살과 비바람으로 배태한 생명력을 열매맺는 것은 계절의 조화인 것이다. 오는 겨울 또한 다음 가을을 위한 준비다. 조화는 또 용서와 이해다. 설령 나를 섭섭하게 만들고 나에게 잘못했다 하여도 그를 용서하고 이해하는 마음이 좋은 것은 나 역시 남을 섭섭하게 만들고 남에게 잘못을 저지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을이 농익었다. 인간은 다툼을 초탈할 수 없을지라도, 되도록 용서와 이해의 폭이 넓은 가을같은 마음을 갖게되면 더 낫겠다고 생각해본다.

/白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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