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10·25 재·보선에서 여당에 완봉승한 것을 ‘반사적 이익’이라고 자평한 것은 맞는 말이다. 한나라당에 대한 지지이기 보다는 잇단 실정투성이, 그리고 갖가지 비리의혹에도 오만하기만 한 정부 여당에 염증을 느낀 민중의 응징인 것이다. 이 총재가 이어 몸을 낮춰 민중속으로 파고 들어가려는 모습도 잘하는 일이다.
그러나 거국내각 또는 중립내각 구성제의는 합리적 인식에 미흡하다. 국가위기 상황의 비상시국이라는 시국관은 과장이다. 경제사정이 몹시 나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 하여 비상시국은 아니다. 내년 양대선거의 공정관리를 위한 중립내각 구성이나 각계의 전문인사들로 요구한 거국내각 구성제의도 그렇다. 중립내각만이 선거의 공정성을 담보하는 게 아니며, 대통령책임제에서 거국내각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를 생각해본다. 내각운영이 식물화로 주도되고 있는 현 정부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대통령책임제에서의 내각구성원이 되는 국무위원, 즉 각 부처 장관은 임면권자인 대통령에게 책임을 지는 것이지 직접 국민에게 지는 것은 아니다. 국민은 내각의 잘못을 대통령에게 문책함으로 인해 장관들은 간접적으로 국민에게 책임을 지고 있는 것 뿐이다. 바꾸어 말하면 내각의 실정은 곧 대통령의 실정이다.
헌법이 정한 국회의 장관 불신임 결의는 장관 자체보다는 그같은 불신임 대상의 각료를 임명한 대통령을 문책하는 성격이 강하다. 더욱이 정책심의의 토론은 간곳 없이 국무총리 이하 각 국무위원이 대통령 ‘분부사항’만 열심히 받아쓰기 일쑤인 지금의 국무회의 분위기에서는 내각의 기능은 이미 밝혔듯이 식물화한지 오래다. 대통령이 국무위원의 업무에 속하는 장관의 경륜을 존중하기보단 대통령 자신의 생각만 주입하려는 국정운영 스타일에서는 거국내각이거나 중립내각이거나 내각이 어떻게 구성되든 별로 기대할 것이 없다. 대통령이라고 해서 각부처 업무에 통달하는 것은 아닌데도 이 정부의 내각은 그렇게 운용돼 왔다.
그럼으로 인하여 이총재의 거국내각, 중립내각 구성 제의는 더욱 공허하다. 원내의석 수가 과반수에 육박하는 거대 야당의 총재쯤 되면 대여정책에 각별한 무게가 있어야 한다. 공허한 내각구성 따위 언급보다는 대통령중심제의 핵심인 대통령에게 직접 묻고 따지는 정책대결, 정책제시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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