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규기자 장에 가다/이천 장호원장

‘청나라 비단장수 왕서방이 청미천(淸渼川) 강줄을 거슬러 중국 비단을 팔러 왔으며 한양의 소금이 뱃길을 따라 거래됐었다’는 장호원장(長湖院場).

400년 역사의 무게를 실은 장호원장이 동트기 전부터 꿈틀거린다.

이천시 장호원읍 오남 3∼5리 일원에서 4일과 9일로 끝나는 날에 장이 서는 장호원장은 그 옛날 시골장터의 풋풋한 인정이 남아있고 고향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원조’격 재래시장이다.

장이 처음 생긴 것은 정확치 않으나 대략 17세기 후반 등짐과 봇짐을 둘러맨 보부상들이 나무그릇·토기·건어물 등 일용잡화와 필묵·금·은·동·장신구 등 값비싼 물건을 장날에 나와 팔기 시작하면서 자연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장호원은 서울에서 충주 등 남북으로 뻗은 3번 국도와 평택·안성·제천·영월을 동서로 잇는 38번 국도, 그리고 양평·여주·음성·괴산을 연결하는 37번 국도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 영동 및 중부고속도로를 이용해 이천톨게이트에서 3번 국도를 타고 30분가량 시원하게 달리면 장호원장에 도착한다.

원래 장호원 시외버스터미널 부근 ‘새장터(新市)’라 불리는 오남 1리에서 열렸으나 장호원읍에 시가지가 형성되면서 지금의 장소로 옮겨져 새롭게 장이 서게 됐다.

경기도 최남단에 위치한 장호원은 다리 하나를 경계로 경기 이천시와 충북 음성군으로 나뉜다.

시장번영회 총무 추교술씨(41)는 “과거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 장호원장에서 흥건히 술을 먹다 통행금지 시간이 되면 청미천 장호원교를 건너 충북으로 피신해 위기(?)를 모면했다“면서 “그러나 통금이 사라지면서 지금은 옛 영웅담(?)으로 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사대문밖 지방시장으로선 그 명성이 자자했었다”는 유명세라도 치르듯 장호원장은 현재 이천 장호원장과 음성 장호원장으로 나뉘어 같은 날 같은 이름으로 불과 1km 거리를 두고 ‘경기장(場)’과 ‘충북장(場)’의 장꾼간 세(勢)싸움이 벌어진다.

음성 장호원장은 전통적으로 우전이 강세를 보인 반면, 이천 장호원장은 기름진 이천쌀을 비롯한 농산물 거래와 생필품·잡화류 등의 거래가 활발했다.

장호원교를 넘어 충북 음성군 감곡면 오향리에서 열리는 우전은 보통 오전 5시부터 8시 사이에 열리는데, 경기와 충북은 물론 전라도와 경상도의 소까지 몰려 장이 서는 날에는 평균 300∼400두씩 거래되고 있다.

1960년대 초 한때 이천 장호원장에도 우전을 개설했으나 음성군 우전세에 밀려 곧 사라졌다. 이로인해 장호원 사람들은 읍내 유일한 극장이었던 장호원 연방극장에 음성 사람들이 다리를 건너 영화를 보러오면 분에 못이겨 내쫓아 보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러나 음성 장호원장보다는 이천 장호원장이 내용이나 규모면에서 월등한 비교 우위를 점하고 있다.

장이 서는 날에는 장호원읍과 인근 설성면·율면·모가면·대월면 아낙네들 뿐 아니라 충북 아낙네들도 산채며 곡물·채소 등을 들고 장호원장에 나온다.

경기와 충북의 지역 주민들이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작은 읍 장호원을 중심으로 두 도(道)의 인심과 경계가 뒤섞여 작은 생활권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장터에는 잡곡·참깨·은콩·녹두·대추 등을 갖고 나온 지역 장꾼들과 서울·이천·여주·안성·용인 등 각지에서 내려온 이동 장꾼들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장이 서는 날에는 장물(場物)들을 싣고 이장 저장 돌며 장꾼들에게 물건을 내려주는 ‘장차’(일명 맹꽁이차·제무쉬(GM)·도라꾸) 수십대가 장날이면 몰려 문전성시를 이뤘으나 지금은 장꾼들의 자가용과 트럭이 대신하고 있다.

농기구 수리공인 것같은 한 노부가 장 한켠에서 이웃 장꾼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

“나? 바둑 8단 프로야. 얘는 초급이야. 뭐 상(床) 파는 놈이 바둑이나 둘줄 알겠냐?”

언론의 취재를 많이 경험해 본 장꾼 할아버지임에 틀림 없었다.

“내 이름은 황자 학자 성자야. 황학성. 나이는 70이고 장돌배기로 나선지는 한 30년 됐어. 그 전엔 택시 좀 했지. 우리 황가로 말하면 황희 정승의 후손이야…. 인터뷰 따나? 출연료는 얼마야? 평해 황가는 좀 비싸.”

황옹의 말에 꼬리가 보이지 않았다. 경기도 가평이 고향이라는 황옹은 장날마다 달마대사 동상을 갖고 다닌다고 했다.

“나는 대사급을 좋아해. 달마·사명·서산·월암대사 말이야. 절에 가면 주지가 있잖아? 그런 사람들은 그냥 중이지 뭐. 급수가 달라.”

충주에서 시집와 60년째 같은 장소에서 포목장사를 한다는 채홍례 할머니(79)는 “명주·삼베가 8남매 고등교육 시키고 시집장가 다 보냈다”며 “이젠 장호원 사람 다 됐다”고 말했다.

인삼이 마를까 연신 분무기로 물을 뿌리는 ‘인삼 아줌마’와 ‘악어가죽 자동벨트 아저씨’, 그리고 ‘생강 아줌마’가 나누는 자식 걱정의 대화도 들렸다.

백화점에서 10만원이상 하는 메이커 구두를 단돈 3천에 판매하는 거짓말같은 사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맘씨좋고 인정많은 천사표 장꾼도 있었다. 여기에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아줌마는 한술 더떠 1천원만 깎아달라며 2천원만 주고는 맘에 드는 구두를 들고 얼른 도망치는 얌체짓을 한다.

“허허, 괜찮아요. 저 아줌만 단골이예요.”

돈주는 사람 맘대로인 ‘손님은 왕’의 생생한 현장을 목격하는 순간이었다.

장호원장은 장부책도 없는데 “닷새 후에 보자”며 외상을 하는 훈훈한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장호원에서 함께 자랐다는 열댓명의 할아버지들이 장 한켠에서 ‘소주내기’ 윷판을 벌이고 있었다. 젊잖게 웃으며 윷돌을 놓는 할아버지, “임마, 점마”해대며 “도다 모다” 우기는 할아버지 등 인심좋은 이곳에서도 보이지 않는 서열과 질서가 흐르고 있는 듯 했다.

5일장이 서는 날은 시골 농촌 사람들에게 명절과도 같은 날. 모처럼 농사일을 제쳐놓고 이웃 주민, 친구들과 농심의 여유로운 한 때를 달래는 휴일인 것이다.

경기도뿐 아니라 충청도·전라도·경상도·강원도 등 이북만 빼고는 안가본 장이 없다는 가마솥 장꾼 오영선씨(42)는 “장호원장은 이번이 첫 방문인데 전국 각지의 다른 5일장과 비교하면 손님이 많은 편에 속한다”며 “오늘은 벌이가 솔찬히 짭짤하다”고 털어놨다.

장호원장은 90%이상이 지역의 토종 장꾼들이다. 외지의 이동 장꾼들이 들어올 때는 장꾼간 자생적으로 구성된 장호원시장번영회에 신고식(?)을 마쳐야 하며, 또 수시로 불법·불량상품을 단속하는 검열과 통제를 받는다. 그래서인지 평온한 질서가 유지되고 있는 장호원장에는 사기꾼이 없으며, 장꾼과 손님간 서로 믿고 거래가 오간다.

시장번영회 김광식 회장(43)은 “장호원장은 분지 지형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장세(場勢)가 다소 드세보이지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정(情)이 샘솟는 장”이라며 “외지 장꾼이 들어오면 지역주민들이 반갑게 맞아주기 때문에 속된 말로 ‘불알 두쪽’만 차고 와도 돈을 버는 장”이라고 말했다.

김 회장은 “20여년전만 해도 장호원시장번영회 회장의 ‘끝발’은 장호원읍장 다음으로 파출소장과 소방대장보다도 위였다”고 은근히 자랑했다.

장을 떠나기가 못내 아쉬워 장호원장의 먹거리 명물 닭발을 시켜 소주 한병을 비웠다. 4천원의 풍족한 인심도 모라자 돼지껍데기 약간을 서비스라며 내놓는 주인 아줌마가 이뻐보였다.

오는 7월 장호원장 한쪽 귀퉁이에 널직하게 자리잡은 이천소방서와 장호원파출소가 다른 곳으로 이전하면 장은 더욱 확 트인 공간에서 쾌적하게 손님을 맞이할 것으로 보인다.

장호원장의 모습은 400년전 그때와 많이 달라졌겠지만 장을 이루는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그 시절과 똑같은 냄새가 난다. 장의 인심이 그대로 살아있는 원조 농촌장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장호원장이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몇백년 후에도 계속 건재하는 ‘장수장’이 되길 기원한다.

/고영규기자 ygko@kg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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