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오십년전 그대로... 정겨운 사람 내음 물씬

장(場)은 언제나 동트기 전부터 꿈틀거린다. 가축들의 울부짖음과 개짖는 소리가 온갖 장물(場物)들을 한가득 실은 장차들의 경음기 소리와 뒤엉켜 오케스트라 화음이 되고, 장꾼들이 부지런히 좌판을 펼치면 장은 아침 햇살이 퍼지기도 전에 북적대기 시작한다. 아침 7시가 채 안돼 오산장은 어느새 손님을 맞을 채비를 끝낸 500여명의 장꾼들로 꽉

들어찼다.

오산시 중앙동사무소와 성호초등학교 사거리에서부터 오산대교까지 약 4km 사이에서 끝자리가 3일과 8일로 끝나는 날에 서는 오산장은 아직도 사람 사는 내음이 물씬 나고 인심과 흥정으로 아우성과 생동감이 넘쳐흐른다.

오산장은 1792년에 발간된 ‘화성궐리지’와 1863년에 발간된 ‘대동지지’, 그리고 1899년에 나온 ‘수원부지’에 그 명칭이 나오는 것으로 볼 때 최소 250년의 역사를 간직한 것으로 추정된다.

1900년대초 경부선 철도의 개통으로 서울의 남대문·동대문시장 및 부산에 물품을 직송했던 오산장은 수원장과 화성의 조암·발안장으로 연결돼 화성·오산 일대의 남부시장권을 형성했다.

근대에 들어서도 오산장은 각종 문헌에 나타난다. 1911년에 간행된 ‘한국수산지’에는 “오산장은 수원군내 5개장(성내장·성외장·오산장·발안장·안중장)중 성내장 다음으로 물자의 집산이 대단히 번성했다”고 기록돼 있다. 또 ‘오산시사’에는 1926년 오산장의 거래액은 23만8천원이고, 오산장을 찾는 사람은 하루 평균 1천명, 거래자는 800명정도라고 구체적인 통계수치까지 밝히고 있다.

6·25전쟁 직후 오산장은 기존 장터에 새장터를 개설해 구장터는 끝자리가 8일, 새장터는 3일인 날에 장이 섰다. 그러나 구장터 집중현상으로 인해 현재 새장터에는 상설점포 상인이, 구장터에는 장돌뱅이들이 중심이돼 신·구장터가 통합 운영되고 있다.

가축전·잡곡전·채소전·약초전·의류전·잡화전·먹거리전 등 장물별로 세분화된 오산장의 겉모습은 평화스러웠다. 이중 기자의 호기심을 끈 것은 가축전.

화성 사강장에서 만난 소몰이 명수 홍사민옹(81)은 오산장은 수원장과 더불어 우전세(牛田勢)가 강해 100리길을 걸어 십여마리의 소를 몰고 갔었다고 증언했다.

오산장의 토박이 장꾼들도 불과 20년전까지만해도 소몰이꾼들이 적게는 3마리에서 많게는 30마리까지 소를 이끌고 오산장을 비롯, 인근의 수원장·화성장·발안장·용인장 등을 다녔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오늘날 오산장에는 우시장은 간데없고, 소규모 가축전이 옛 영화를 대신하고 있다.

가축전은 오산장에서 100m가량 떨어진 오산복개천 하상주차장에서 열린다. 옛 우전의 명성에 힙입어 가축전은 오산장에서도 가장 거래가 왕성해 장 중앙부의 넓은 공터에서 열렸으나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몇년전 외곽으로 밀려났다.

자신의 운명을 알고있는 듯 더위에 지쳐 힘없이 누워있는 토끼·닭·꿩·오리·염소·개들이 새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냥·수렵·경비·투견 등의 용도로 쓰이는 특수견을 전문으로 파는 ‘개장꾼’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양주석씨(46)가 울퉁불한 손으로 팔목을 잡아끌었다.

“이 개는 ‘허리케인 롯트바일러’란 건데 독재자 아놀드 히틀러의 애견이었다”며 족보 자랑부터 늘어놓은 양씨는 트럭에서 자신이 만든 종합 개 카탈로그를 꺼내보이며 개 강의를 시작했다.

양씨는 점점 시들해져가는 5일장 활성화 방안에 대한 10여년간의 연구성과(?)도 털어놨다.

“시나 관계당국에서 더럽다고 자꾸 밖으로 내몰면 안돼. 장꾼들에겐 생존이 달린 문젠데 자꾸 내쫓으면 죽으라는 소리지. 세상이 아무리 달라졌다해도 전통을 무시하면 큰 코 다쳐. 가축전은 오산장을 대표하는 명물전이야. 충분 진천장과 같이 점포가 있는 상설 재래시장 상인과 전통 민속 5일장 장꾼들의 발전을 공동 모색할 수 있는 계획안이 마련돼야해.”

초여름이 시작되는 오산장에는 모내기를 끝나고 한숨을 돌린 농사꾼과 인근 주민들이 몰려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투박하고 거친 손에 바를 화장품을 사러나온 농부의 아낙네들, 그동안 농사일로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아이들과 남편의 옷가지를 챙기러 나온 주부들, 모처럼 동네 사람과 어울려 막걸리라도 한잔 걸치려고 나온 촌부들. 그래서 장은 200년전 그 때를 재현이라도 하듯 인심과 온정이 가득했다.

사방이 십자로로 뚫린 오산장 골목골목에 펼쳐진 장꾼들의 좌판은 다른 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패인 할머니가 장돌뱅이로 잔뼈가 굵은, 조금은 되바라져 보이는 또래 할머니 장꾼에게 1천원을 건네며 마늘 한되박과 함께 500원을 거슬러 받고 있었다.

“한 접에 100원을 주면 50원을 거슬러 받을 때부터니까 이 할멈 알고지낸지가 20년은 족히 넘지.” 그러나 오랜 친구로 보이는 두 할머니는 서로의 이름도 성도 아무것도 몰랐다.

장꾼들은 이장 저장 돌며 적어도 5일에 한번은 만나는 사이인데도 이웃 장꾼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 그저 ‘김씨’ ‘이씨’ ‘박씨’라고 부르면 서로 알아듣고 마음을 나누는 것이다.

“알면 속상하지. 장꾼들 사연을 들어보면 소설 몇권은 쓸 걸.” 자신을 ‘김씨’라고 소개한 장꾼이 훈수를 놨다.

장을 걷고 있는데 부부로 보이는 장꾼 내외가 고개를 떨구고 기자의 시선을 애써 피했다.

“낯이 많이 익은데, 저 혹시…” “예 맞아요. 고양 일산장에서 만났었죠?”

기억이 떠올랐다. 올 봄 일산장에서 도장을 새기는 남편 옆에서 소일거리를 거들고 있는 부인이 너무 미인이어서 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찍지 말라”며 버럭 화를 내며 카메라를 막았던 그 아줌마였다.

“그땐 미안했어요. 장에 처음 나온 ‘신삥’일 때라서 좀 당황했어요. 게다가 신문에 우리 사진이라도 실려 사람들이 알아보기라도 하면….” 말을 흐렸지만 무슨 말인지 금새 접수했다.

남편은 공학박사였는데 사업이 부도가 나 소자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고민한 끝에 도장을 파기로 작정했다는 것.

“처음엔 남편 혼자 다녔는데 지금은 둘이 같이 다녀요. 도장이 작아서 손이 잘 타거든요. 남편이 이름을 새기는 동안 저는 도장을 지켜요. 도장 팔 손님들의 이름도 접수하고.”

일산장에서와는 달리 오산장에서는 제법 어설픈 장꾼 냄새가 났다. 그래도 이들 장꾼은 왠지 고상하고 지적인 인텔리 냄새가 풍겨 5일장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지나친 고정관념일까.

국·보물급 문화재 관리 실종의 현장인가. 청자·백자·놋그릇·은수저·촛대·불상, 그리고 200여개의 고물시계와 수천개의 옛날돈들이 장바닥에 진열된 ‘벼룩만물상’이 눈길을 끌었다.

오산장에서 10년째 벼룩만물상을 운영하고 있다는 이 장꾼은 3년전 2만원에 청자를 사서 5만원에 팔았는데, 나중에 5만원에 산 사람이 300만원에 다른 사람에게 팔았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능청을 떨었다.

오산장에는 하루 평균 2만명의 손님이 찾는다는 게 시장 관계자의 설명이다. 손님의 70%는 오산 시민이고, 나머지 30%는 용인 남사면, 평택 서탄·진위면, 화성 정남·동탄면 등 인근 주민들이라고 했다. 이들이 흘리는 쌈지돈이 대략 4∼5억원정도 된다고 하니 손님 1인당 2만원 정도를 장에서 지출하는 셈이다.

한편 오산시는 40여억원을 들여 지하주차장, 아케이드 설치, 투스콘 포장 등 환경개선사업을 실시, 오는 2003년까지 오산장을 현대화된 백화점식 시장으로 탈바꿈시킬 계획이다.

그러나 난장을 펼치고 있는 장꾼들은 다른 장에 비해 밥벌이가 되는 오산장이 현대식으로 바뀌면 언제 쫓겨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오산장에는 상설 점포 상인들이 2천여명인데 반해, 난장을 펼치는 떠돌이 장돌뱅이들은 500여명으로 수적 열세에 있다.

수원장과 더불어 경기남부권의 큰 장세를 형성했던 오산장. 난장을 펼쳐지고 장꾼들과 월남치마에 장바구니를 둘러맨 손님간 구수한 입담과 흥정이 오가는 오산장이 현대화란 거대한 물결속에 영원히 잠길지도 모를 일이다.

/고영규기자 ygko@kg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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