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측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일본인 납치 사과 및 재발방지 다짐은 놀라운 입장 변화다. ‘일본은 납치다 뭐다 하는 소리를 그만두라. 납치란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던 종전의 주장을 완전히 뒤엎었다. ‘대남공작을 위해 한 일’이라고 까지 말한 것은 더욱 충격이다. 물론 몰랐던 것은 아니나, 최고 권력자의 입에서 대남공작이 시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인 점에서 주목된다.
북측이 고이즈미 일본 총리에게 확인해준 11명의 납치자 가운데 1987년 KAL 폭파범 김현희 공작원에게 일본어를 가르친 다구치 야에코란 당시 30대 여성이 있다. 이 사람이 바로 1991년 김현희가 내외신 기자에게 밝힌 일본어 교사 ‘이은혜’인 것이다. 이는 최근까지 ‘이은혜’는 날조된 가공인물로 내세웠던 끈질긴 주장이 허구임을 드러냄으로써 KAL폭파가 자신들의 소행임을 간접 시인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괴선박도
시인했다. 김위원장은 ‘자신도 몰랐던 일로 특수부대가 한 짓’이라며 조사중이라고 했다. 일본 열도는 일본인 납치를 시인받은 고이즈미의 방북을 평가하면서도 납치자 중 5명만 생존해 있다는 보도에 오열을 터뜨리며 들끓고 있다.
우리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김위원장이 시인한데는 북·일 국교정상화에 실질적 최대 걸림돌을 제거함으로써 130억달러로 전망되는 경협자금을 최대한 이끌어 내려는 계산이 깔려있음을 간파하기가 어렵지 않다. 하지만 고이즈미는 단 한번의 담판으로 한사코 없다고 주장해온 일본인 납치를 시인받았다. 이에 비하면 그간 막대한 경협자금을 북에 갖다 주면서도 아웅산 사건이나 KAL폭파사건
등은 금기사항인 것처럼 얘기도 못꺼내는 우리와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1953년 휴전이후 480여명이 북에 납치되고 전쟁 중 납북자, 억류된 국군포로 등이 2만6천여명에 이른다. 이런데도 정부는 이들에 대한 대책을 철저히 외면해 오고 있다.
남북화해의 기운을 해치지 않기 위해 이에 대한 거론을 피한다는 게 정부측 생각임을 모르진 않는다. 그러나 일본인 납치가 대남공작용임이 확인된 이상 거론할 때가 됐다. 참다운 화해는 숙원의 과거 앙금을 하나하나 걷어냄으로써 더욱 가능하다. 더 나아가 6·25전쟁에 대한 북측 사과도 받아내야 한다. 김정일 위원장의 대남, 대일외교 차별은 고이즈미의 의지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의 정부는 북측 차별대우를 스스로 자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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