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김봉천 화백을 애도하며

키는 오척 단구였지만 몸은 단단했다. 반백이 넘어 거의 순백의 머리인데도 항상 짧게 깎곤하였다. 낙천적이면서 날카로웠고 호방하면서 섬세한 면면을 보이기도 했다.

김봉천(金峰千·본명 완걸)화백, 그가 경기일보사 창간 멤버로 몸담아 만평을 집필한 것은 환갑이 갓 지나여서였다.

일찍이 조선일보, 중앙일보에서 활약, 잠시 은퇴했다가 경기일보에서 새출발했다. 중앙 언론계에서 30여년을 일했으나 지방지에서 새로운 지평을 개척해 보이겠다며 나이를 잊고 살았다. 언제나 청춘의 마음을 드러내 보여 때로는 주책이 없다는 말을 듣곤 했으나 개의치 않았다.

노익장의 열정, 노익장의 그림은 그래서 가능하였다. 나이는 많아도 젊은이 못지않는 감각을 그래서 키울 수가 있었다. 입바른 말을 지나치게 잘하여 오해를 받기 십상이었으나, 그의 만평은 그래서 기지와 해학이 넘쳤다. 때로는 촌철살인의 날카로움이 있었고, 때로는 홍소를 자아내는 재치가 번쩍 거렸다.

그것은 일에 대한 집념의 소산이었다. 낚시를 즐겼던 그는 밤낚시를 가도 잠을 자는 일이 없었다. 고기가 잘 잡히든 잘 안잡히든 간에 밤새 껏 낚시에 몰두하곤 하였다. 일도 이런 식으로 했다.

부인을 중풍으로 앞서 사별했다. “이젠 언제 가도 여한이 없다”고 하던 그가 마침내 부인을 따라갔다. 일흔일곱을 생애의 일기로 지난 14일 오후 4시5분 별세하여 오늘 서울 강남성모병원에서 발인한다.

평생을 신문 만평가로 지냈지만 화단의 재야출신 화가이기도 하다. 조그마한 화실을 열어 작품을 해가며 소일한다더니 그만 이승을 떴다. 자녀들이 무척 효자였다. 그런데도 자녀들 보다는 부인이 더 좋아서였든지 훨훨 털고 떠났다. 고인은 자신의 뜻대로 지방지의 신문 만평에 새 금자탑을 쌓은 공적을 남겼다.

그는 기전언론에 몸 담은 것을 기쁘게 생각했고, 그에게 초대 화백 자리를 맡긴 경기일보 역시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오늘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는 고 김봉천 화백을 애도하며 삼가 명복을 빈다. 아울러 유족들에게 깊은 위로의 뜻을 표한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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