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 무궁화(無窮花)가 많이 자라고 있었다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산해경(山海經)’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은 서기전 8∼3세기 춘추전국시대에 저술된 지리서(地理書)라고 전해 내려오는 문헌이다. 동진(東晋)때 곽박(郭璞)이 그때까지의 기록을 종합, 정리한 것이다. 이 책에 “군자의 나라에 훈화초가 있는데,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진다(君子之國有薰花草朝生暮死)”라는 기록이 있다.
군자국은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것이다. 훈화초는 무궁화의 옛 이름이다. 이로 미루어 아주 예로부터 무궁화가 우리나라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라 효공왕이 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에게 작성시켜 당나라에 보낸 국서 가운데 “근화향(槿花鄕·무궁화의 나라·신라)은 겸양하고 자중하지만 호시국은 강폭함이 날로 더 해 간다”고 한 것이 있다.
1935년 10월21일 동아일보 학예란에 ‘조선의 국화 무궁화의 내력’이라는 제목 아래 “아마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에 조선에도 개화풍이 불어오게 되고 서양인의 출입이 빈번해지자 당시의 선각자 윤치호(尹致昊) 등의 발의로 양악대를 비롯하여 애국가를 창작할 때에 애국가의 뒤풀이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이라는 구절이 들어가면서 무궁화는 조선의 국화(國花)가 되었다. 안창호(安昌浩) 등이 맹렬히 민족주의를 고취할 때에 연단에 설 때마다, 가두에서 부르짖을 때마다 주먹으로 책상을 치고 발을 구르면서 무궁화 동산을 절규함에 여기에 자극을 받은 민중은 귀에 젖고 입에 익어서 무궁화를 인식하고 사랑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로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이라는 말은 우리 한 민족의 가슴 속에 조국에 대한 영원한 사랑의 뜻으로 남게 되었다.
오늘날 어버이 날에 카네이션 대신 무궁화를 달아 드리는 풍습이 생겼다. 수원 영복여자중학교 학생들과 교사들은 예년과 마찬가지로 올해도 각 기관·단체를 다니며 어버이 날에 무궁화를 직접 달아주어 기쁨을 주고 있다. 나라 사랑, 무궁화 사랑 활동에 앞장서는 영복여중의 노고가 재삼 돋보인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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