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교산의 아침/양평 '소나기 마을'에 대한 단상

햇수로 벌써 20년도 훨씬 지난 시절의 얘기다. 청량리역에서 기차에 몸을 싣고 중앙선을 달리다 보면 양평까지 오른켠엔 늘 강이 따라 왔었다. 지금이야 아파트단지들이 들어 서 흔적을 찾아 볼 순 없지만 30년 전만 해도 연탄공장들은 왜 그리 많았는지.

청량리를 지나 현재의 남양주시로 들어서기 전까지, 아니 더 정확하게 기억하자면 청량리부터 사이좋게 펼쳐지던 레일이 춘천으로 가는 길목에서 한줄은 중앙선으로, 또 한줄은 경춘선으로 갈라 지기 전까지는 후줄근하고 꾀죄죄한 도회지 건물들 사이로 연탄공장들이 즐비하게 늘어 서 있었다. 차창으로는 주근깨같던 석탄가루들이 덕지덕지 달라 붙었다 떨어졌었고 수십분을 그렇게 시달리다 견디지 못하고 결국 눈을 감고 억지로라도 잠을 청하곤 했었다. 잠깐 잠이 들었지만 꿈도 총천연색이 아닌 시꺼멓던 기억….

그러다 화들짝 놀라 잠이 깨는 지점이 있었다.

강, 그리고 양평.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 진다는 ‘양수리(兩水里)’. 오염되지 않고 때 묻지 않은 순결함이 풍겨주는 특유한 체취때문이었을까. 산보다는 유유히 흐르는 강이 더 정겹기도 했지만 강변을 따라 가쁜 숨을 내뱉으며 달려 오는 바람이 꽤 삽상했었다.

강. 중앙선은 한마디로 ‘강’그 자체였고, 양평은 그 한복판에 있었다. 지금도 서울에서 불과 1시간 남짓 떨어진 곳에 이처럼 맑고 깨끗한 청정구역이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뜨거워진다.

황순원씨의 단편소설 ‘소나기’의 무대가 양평이란 주장이 제기돼 화제다. 사춘기에 접어든, 그래서 이성에 대한 그리움에 막 눈이 뜨는 소년과 소녀와의 풋사랑을 그렸던, 그래서 아득한 시절 첫사랑의 초상화로 기억되고 있는 ‘소나기’를 읽어 보지 않은 젊은이들은 없을듯 싶다. 바로 이 작품의 배경이 양평이란 얘기다.

이같은 주장은 작품의 후반부 귀절을 토대로 하고 있다.

‘갈밭머리에서 바라 보는 서당골마을은 쪽빛 하늘 아래 한결 가까워 보였다. 어른들의 말이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간다는 것이었었다. 거기 가서 조그마한 가겟방을 보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양평읍 원덕리가 바로 소녀네가 살던 곳이었고, 양평읍 소재지로 이사간다는 게 자연스럽게 추측될 수 있다.

문인들은 작품중 윤초시 문중이 있던 곳으로 서종면 노문리를 거론하고 있다. 실제로 이곳에는 갈밭마을과 서당골마을이 실존했었고 소설 속에서도 이 명칭들이 등장했었다. 소설이 묘사하고 있는 풍경도 양평과 몹시 흡사하다.

황순원씨 후배들은 이같은 사실이 학문적으로 입증되지 않더라도 양평에 ‘소나기 마을’을 조성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늦은 감이 있지만 꽤 반가운 소식이다. 다른 지자체들은 벌써 몇해 전부터 이같은 이벤트를 시작하고 있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의 고장, 평창군 봉화와 김유정의 ‘동백꽃’의 배경인 춘천 등을 비롯, 최근 들어선 조정래 장편소설 ‘태백산맥’의 전남 벌교 등이 문학적인 토양과 배경 등을 바탕으로 테마마을과 박물관 등을 속속 건립중이고 작품 속의 지명과 하다 못해 작가가 잠깐 머물렀던 공간까지도 볼거리로 조성하고 있다.

이젠 문화콘덴츠로 승부를 걸 때이다.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의 성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21세기는 누가 뭐라고 해도 문화콘덴츠시대다.

/허행윤.제2사회부장/heohy@kgib.co.kr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