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유학 당시 알고 지내던 유학생과 교민들이 지난 달 노무현 대통령 방미 기간중 논란이 일었던 ‘저자세 외교’에 대해 기자에게 보냈던 이메일의 요지는 대략 이러했다. “우리라고 왜 미국에 서러운게 없겠습니까. 하지만 자주를 강조하기엔 아직 한국의 힘과 건강함을 더 길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이 노무현 정부의 외교력 미숙과 총선을 앞둔 여야의 속내를 파악못하고서 이런 순진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한 가지 사안에 대해 거리를 둠으로써 객관적인 상황 파악이 용이하다는건 상식에 속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방일기간중 유사법제 등을 통과시킨 일본정부와 정치권측에 강한 메시지를 던지지 못한 자세를 놓고 정치권이 어지럽다. ‘한일양국간 미래지향적 관계정립’이라는 긍정적 반응과 방미에 이은 ‘제2의 저자세 외교’라는 엇갈린 반응이 나오는 등 방미외교 당시와 유사한 분위기가 재연되고 있는 것이다.
노 대통령의 방일기간 중 통과된 일본 유사법제를 둘러싼 논란이나 과거사 문제를 우회한 노 대통령의 구체적 방일성과에 대해 총체적 외교미숙이란 평가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부분이다. 게다가 피해의 역사를 가진 우리가 먼저 매듭을 풀기위해 성의와 노력을 보였음에도 일본이 노 대통령의 방일기간 내내 보인 태도는 실망스럽다 못해 참담하단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노 정부 출범 이후 처음 선보인 실용주의 외교노선이 굴욕외교라고만 단정을 내리기엔 ‘냉엄한 계산’이 결여된 듯해 아쉽다는 생각이다. 국제사회에서 외교는 힘이 앞서는 나라가 우선권(Priority)을 쥐는 것이 자명한 이치이다. 한꺼풀 벗기면 약소국이 외교를 통해 내밀 수 있는 카드가 그리 많지 않다는 뜻으로도 풀이된다.
노 대통령과 미 부시 대통령의 20분간의 정상회담이 ‘외교적 산물’임에 안주할 때, 부시 대통령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총리를 휴가지인 텍사스주 크로포드 목장으로 초대해 양국의 우의를 세계 만방에 과시했다.
텍사스주는 어떤 곳인가. 알래스카를 제외한 본토에서 가장 큰 주임을 새삼 강조할 필요없이 12시간을 자동차로 달려도 주간 경계선을 벗어나지 못하는 광활한 평원을 드러낸다. 게다가 불모지라면 모르겠으나 한국이나 일본에선 평생 볼 수도 없던 사마귀 형상을 한 석유시추기가 200~300m 간격으로 늘어서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게된다.
뉴욕증권시장은 어떤가. 세계 주식시장 시가 총액 25조 달러의 40% 내외인 10조 달러가 이 곳에서 거래된다. 일본은 2조 달러, 한국은 2천5백억 달러 정도다.
크로포드 목장에서 대평원을 바라보는 고이즈미 총리의 머릿속에는 혹시 과거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했던 일본의 무모함이 오버랩되진 않았을까. 자본의 힘으로 이미 핏줄을 이룬 일본이 이번엔 하드웨어인 군사력을 통한 근육 만들기로 몸부림치는 시점이다. 노 대통령이 유사법제 통과로 주변국들이 우려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건만 일본은 이미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My Way(군사대국화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국가의 원수가 숙련도는 부족할 지언정 외교활동으로 동분서주하고 있는 이 때, 국내에서 ‘등신 외교’라며 망발을 쏟아내는 정치권을 바라보며 일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정작 국회는 11일 대정부질문에서 의사정족수(55명·재적의원 5분의 1)조차 채우지 못해 유례없이 50분이나 지연되는 ‘지각 국회’ ‘망신 국회’를 자초하고 있다.
미국에서 행정학과나 정치학과가 전공인 대학원생들에게 고전처럼 통하는 제렐 로자티 교수의 ‘미국 외교정책의 정치학’의 서문을 펼치면 다음과 같은 진부한 문장이 나온다. ‘국가는 국익을 위해 존재한다’
이미 우리 국민은 꼭 1년전 월드컵에서 국익을 위한 초당파적 역동성을 확인한 바 있다.
다음은 정치권이 할 일이다.
/송기철.정치부장(국회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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