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華城)과 화성행궁이 장헌세자(조선조 22대 정조의 생부)의 권위와 국왕의 정치적 위용을 돋보이게 하는 왕권 강화의 상징물이라면 장용외영(壯勇外營)은 정조(正祖)의 정치력을 뒷받침하기 위한 친위 군사력이었다. 장용외영은 화성 축성 후 국왕의 호위와 화성 방어를 담당한 정예의 군사력이자 정조의 전제적 왕권을 안정, 지탱케 한 버팀목이었다.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정조는 새로운 금위체제를 위하여 1785년 무과출신의 정예금군을 두어 국왕 호위 전담 부대 장용위(壯勇衛)를 창설하였다. 내영(內營)과 외영으로 나눈 장용영의 내영은 한양 도성을, 외영은 수원 화성을 중심으로 갖추어졌다.
장용외영제는 수원부를 화성으로 개칭하고 정3품의 부사에서 정2품의 유수로 승격, 장용외사와 행궁정리부직을 겸하게 하였다.
정조는 현륭원(융릉) 원행 때마다 군복을 착용했다. 때로 6천200여명이나 되는 어가를 호위하는 원행 행렬은 군사훈련을 방불케 하였다. 화성에서 처음 대규모의 군사훈련이 시작된 것은 6차 원행 때인 정조 19년(1795) 윤2월 상순(12일) 이었다.
을묘년은 어머니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의 회갑인데다 화성 성곽이 거의 모양을 갖춰 가고 있을 때 였다. 이해 12일 밤 정조는 팔달산 정상 서장대(西將臺)에 올라 성대히 거행된 성조(城操:성위에서 수비하고 공격하는 훈련)와 야조(夜操:야간훈련)를 총지휘했다.
정조는 화성 완공 직전인 왕 20년(1796) 1월22일 7차 원행 때 동장대(東將臺:연무대)에 나아가 무예를 시험하고 군사를 사열했다. 이때 군용이 엄히 정돈된 것을 가상히 여겨 유수 조심태에게 구마(廐馬)를 내려주고 73세의 나이로 과녁을 명중한 김시묵에게는 호피를 하사하였다.
화성에서의 군사훈련은 정조의 행차 때마다 실시됐다. 정조 14년부터 화성과 인근 백성에게 시사(試射)를 통해 무과 응사입격자를 뽑는 것을 정례화하였으며 궁술이 탁월한 정조는 기회 있을 때마다 대신과 백성 앞에서 모범을 보였다.
정조는 오래 전부터 군제에 적용해온 ‘병학지남(兵學指南)’의 소루한 점을 보충하고 강목을 새로 세워 ‘병학통(兵學通)’을 완성하기도 하였다. 특히 왕 14년 겨울에는 생부(장헌세자)가 생전에 착수했던 작업을 이어 받아 ‘무예도보통지’를 완성, 간행하고 이후 4종의 병서를 더 편찬 할 만큼 군사이론가로서도 깊은 조예를 갖추었다.
정조가 설치한 장용영에서의 군사훈련시 시범은 물론 팔도군영에서 연마한 무예는 ‘24반무예’였다.
지상무예 18가지와 마상무예 6가지를 합친 ‘24반무예’는 동양무예의 정수로 ‘무예도보통지’에 보(譜)와 도(圖)로 나뉘어 상세히 기록돼 있어 전승이 가능토록 하였다. 그렇다 하여도 200여년이 흐른 오늘날 장창·죽장창·기창·당파(삼지창)·낭선·기(騎)창·쌍수도·예도·왜검·교전·제독검·본국검·쌍검·마상쌍검·월도·마상월도·협도·등패·권법·곤방·편곤·마상편곤·격구·마상재 등 24가지의 무예로 적을 무찌르고 심신을 단련하는 ‘24반무예’가 일반에게 공개된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1989년 창립된 ‘24반무예보존회(대표 김영호)’가 24반무예의 본 고장 수원 만석공원에서 지난 9월 6일 시연(공연)을 가졌을 때 시민들은 화성의 역사와 함께 장용영을 통해 국방과 내치에 주력했던 정조의 실학사상을 다시 보는 기쁨을 만끽했다.
10월19일까지 매주 토요일, 일요일 오후 수원 만석공원과 화성행궁, 영통 벽적공원에서 신기(神技)를 펼치는 ‘24반무예’는 본국검이 붉은 노을을 등에 지고 천년의 단심을 베어 내고, 월도는 웅혼한 기세에 달빛마저 잠들게 한다. 24반무예의 검무(劍舞)에 산 자와 죽은 자의 영혼이 교감하고 수원 화성의 무혼(武魂)이 화성행궁 장용영에서 되살아난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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