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경영 판단은 존중하는 반면에 비자금에 의한 뇌물공여는 민사상의 책임을 물었다. 삼성전자 소액주주들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대한 서울고법의 이같은 항소심 판결은 매우 주목된다.
이천전기의 인수 실패가 설령 경영 판단이 잘못된 것이라 할 지라도, 이에 책임을 묻는 건 경영이 위축될 우려가 있다고 경영의 틀을 크게 본 것은 설득력이 아주 높다. 실패한 경영이라 할 지라도 고의가 있었거나 현저한 과실이 없는한 적법한 경영 판단으로 간주한 것은 경영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재계의 의중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판결이 관행적 비자금을 부정적으로 본 것은 기업 경영의 투명성을 촉구한 준엄한 문책이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1988년 3월부터 1992년 8월 사이에 삼선전자를 통해 조성한 75억원을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뇌물로 공여한 것을 어떻게 보느냐가 다툼의 요지였다. 이에 손해배상 소멸시효가 끝난 5억원만 제외하고 70억원에 대해 배상 책임을 인정한 것은 주주들이 기업 총수를 상대로 민사상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새로운 길이 트였다 할 수 있다.
비자금 공여는 기업을 보호하기 위한 경영의 관례라며 배상 책임을 적극 부인했던 이회장측 주장은 판결에서 완전히 배제됐다.
기업 경영의 판단부분은 삼성이 완전승소한 반면에 비자금 공여엔 완전패소한 이번 판결은 앞으로 재계에 미치는 파장이 적잖을 것으로 전망된다. 대선자금 수사와 관련, 대기업 총수들의 검찰 소환이 줄을 잇고 있다. 또 검찰 수사는 이들 기업의 상당한 비자금 조성 단서를 이미 잡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분식회계의 원인이 되기도 했던 비자금 조성 관행은 더 이상 관행이 될 수 없다.
대기업들은 정권에 대한 보험료로 비자금에 의한 불법 대선자금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런 측면을 전혀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권에 영합하기 위해 비자금 공여를 즐겼던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대선자금 수사로 대기업의 불법자금 조성 사실이 드러나면 주주대표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이 잇따를 것으로 보는 관측은 당연하다. 재계의 사고방식도 이젠 달라져야 한다. 이번 삼성전자 관련의 항소심 판결은 이를 말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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