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 스님의 다비식

중도 여러 가지다. 산중에 칩거만하는 산승(山僧)있다. 불학(佛學)에 조예가 깊은 학승(學僧)이 있고, 참선지도를 일깨운 선승(禪僧)이 있다. 이런가 하면 집집마다 찾아 목탁을 두드리며 시주를 받는 탁발 수도승으로 걸승(乞僧)이 있다. 또 중은 중이지만 속태를 벗지못한 중으로 속승(俗僧)이 있다. 고매한 중으로는 걸출한 중을 일컫는 걸승(傑僧)이 있고, 학행이 드높은 고승(高僧)·성승(聖僧)이 있다.

‘부처의 눈엔 부처만 보이고 돼지의 눈엔 돼지만 보인다’고 했다. 이러므로 사물을 통해서 일깨움을 받는다면, 예컨대 하잘 것 없는 창녀를 통해 깨친 바가 있으면 창녀 또한 부처라는 것이다. 하물며 속인도 아닌 중을 두고 구분하는 것이 큰 속절이 있을까 마는 그래도 중 또한 중 나름인 것 같다.

이 시대 불교의 표상이었던 성철 스님이 고승이라면 얼마 전에 입적한 장좌불와 1일1식의 청화 스님은 선승인 것이다. 두 스님 다 또 산승이기도 하다.

이에 비해 지난 22일 화성 용주사에서 다비식을 가진 정대 스님은 동국학원 이사장 등을 맡아 현대 불교사에 큰 공을 세운 대표적인 학승이다. 조계종 총무원장인 법장 스님이 “산에 큰 나무가 쓰러진 것처럼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고 한 정대 스님의 법체도 이젠 사리만 남긴 채 한 줌 재로 돌아갔다.

불가에서는 이승을 떠나는 열반을 중인의 괴로움과 번뇌를 끊고 불생 불멸의 법성을 증험하는 해탈의 경지로 설명한다. 그러나 석가가 사라쌍수 아래서 열반한 열반도에도 제자들과 천룡 귀축 등이 통곡하는 모습이 그려진 것을 보면 이승에 남는 사람들로써는 역시 슬픔이 아닐 수 없다.

가면 또 온다던가, 큰 중이 가면 작은 중이 큰 중이 되어 중생을 제도하겠지만, 어떻든 큰 중들이 자꾸 떠나는 게 허전해진다. 비단 불교만이 아니다. 종교계의 거인들이 좀 더 장수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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