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월남(베트남)이 간첩에 의해 멸망했다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월남 전체 인구의 0.5%를 차지하는 5만여명의 공산월맹 간첩들은 민족주의자, 평화주의자, 인도주의자로 위장한 채 시민·종교단체는 물론 대통령 비서실장과 장관, 도지사 등 권력핵심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간첩이었다는 사실은 월남패망으로 수 많은 시민들이 죽어간 이후에나 확인됐다.
세계 4위의 화력을 자랑하던 월남은 군화조차 신지 않고 남진하는 월맹군에게 1975년 4월30일 적화돼버렸다. 같은 해 1월3일 월맹군이 남진을 시작한 지 넉달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월남의 공산화는 참혹했다. 사이공 함락 후, 월남의 모든 군인·경찰·공무원·지도층인사·언론인·정치인들은 ‘인간개조 학습소’에 수감됐고 이중 다수는 생사불명의 상태가 됐다.
하층의 월남국민들은 소형선박을 이용해 목숨을 걸고 탈출에 나섰다. 보트피플의 숫자는 약 106만명, 이 중 바다에 빠져 죽거나 해적에게 살해당한 숫자가 11만명이었고, 살아서 해외로 이주한 사람이 95만명으로 집계됐다.
당초 월남은 경제력은 물론 군사력에서도 월맹을 훨씬 앞질렀지만 부패했고, 간첩들은 부패척결과 반전평화를 명분으로 월남의 신경망을 장악해갔다.
1967년 치러진 월남 대통령 선거에서 차점으로 낙선된 야당지도자 쭝딘쥬도 대표적인 간첩이었다. 그는 “외세를 끌어 들여 동족들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조상들이 얼마나 슬퍼하겠느냐”며 월맹에 대한 포용정책을 주동했다.
“월남은 힘으로 망한 게 아니다. 월남은 부정부패로 망하고, 속임수로 망하고 극성맞은 데모로 망하고, 간첩들에 의해 망했다” 주월 마지막 공사로서 월남 패망 후 월맹군에 체포돼 5년동안 억류됐다 구사일생으로 귀환한 이대용씨의 증언이다.
그런데 남북으로 분단된 대한민국에선 요즘 고정간첩을 체포했다는 뉴스가 나오지 않는다. 남한에 간첩이 없는 것인 지, 간첩을 잡아들이는 기관들이 일을 제대로 안한다는 것인 지 궁금하다.
/임병호 논설위원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