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웃는가, 당신 우는가, 웃을 만도 하고 울 만도 하다. 실컷 웃으라, 실컷 울으라, 어차피 시대의 윤회인 것을, 이도 국운이므로 받아 들여 새로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명심할 게 있다. 승자의 웃음도, 패자의 울음도 영원한 것은 아니다. 기껏 반십년의 세월이다. 승자의 오만이나 패자의 한풀이는 타임머신을 다시 과거로 되돌리는 저주다.
더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말 한마디로 하늘을 날으는 새도 떨어 뜨릴만큼 위세가 당당했던 그들이 대를 이어 영어의 몸이 된 전철을 지금 웃는자들은 가슴 깊이 새겨 경계하여야 한다.
뼈저린 서러움으로 고독에 떨던 그들이 영광을 되찾고 나선 객기를 일삼은 잘못된 전철을 지금 우는자들은 마음속 깊이 새겨 두어야 한다.
격동의 시대다. 가치관의 변화는 참으로 힘든 진통을 동반한다. 모험은 도약과 위기의 고비다.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기대와 불안이 엇갈리는 혼돈의 시대다.
좀 더 시야를 넓게 보고, 좀 더 멀리 보아야 한다. 이를 보지 못하고 웃는 웃음은 공허하고, 이를 외면하고 우는 울음은 의미가 없다. 이제 다 웃고난 승자는 뭘 할 것인가, 이제 다 울고 난 패자는 뭘 할 것인지가 큰 과제다. 승자든 패자든 해야할 일은 다 있다.
민초는 지금 웃는 자들의 말이 너무 많아 헷갈리고 우는 자들의 말이 너무 적어 어리둥절하다. 그래서 갈피를 못잡는 민초들은 마치 시험지 배부를 기다리는 수험생 같은 심정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자고 한다. 민초들이 살기좋은 세상이 더 나은 세상이다. 민초가 피땀을 흘리지 않게하는 세상이 더 나은 세상은 아니다. 이런 세상은 그 어디에도 있을 수 없다. 민초는 더 많은 피땀을 흘릴 기회가 있어야 하고 이런 피땀이 조금도 헛되지 않게하는 세상이 더 나은 세상이다.
웃는 자에게도 우는 자에게도 들려주어야 할 말이 있다. 더 나은 세상을 빙자하여 당신들은 민초들 위에 군림해 왔다. 선거란 이름의 행사만 치르고 나면 다시 오만해져 마치 철 지난 옷 대하듯 했다. 우리의 민초는 당신들 지배계급의 지배수단으로만 이용됐다.
이제는 안 그러겠다고 한다. 안 그러기 위하여 개혁을 한다고 한다. 믿어달라고 한다. 뭘 어떻게 믿으란 말인가, 민초는 언제나 믿어왔다. 그리고 그때마다 배신 당했다. 당신들이 믿으라고 하기 이전에 먼저 믿게끔 해보여야 한다. 말로서는 안된다. 말엔 이제 넌더리가 났다.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실행해 보여야 한다. 어려움이 많음을 모르진 않는다. 다원화사회의 이해 충돌은 참으로 난해한 문제점이 많다. 이러므로 당신들이 먼저 손해를 감수해 보여야 한다. 그래야 승복한다.
참다운 개혁은 승자의 전리품 같은 편익시설이 아니다. 웃는 자에게도 불편한 개혁이 되어야 우는 패자들도 따른다. 그래야 민초들 역시 공감한다. 기득권 포기는 지금 우는 자들만의 것은 결코 아니다. 지금 웃는 자들에게도 포기해야 할 기득권은 아주 많다. 세상이 이렇게 위에서부터 달라질 때 비로소 세상은 정말로 달라진다. 아래서부터 달라지길 바라는 세상은 맨날 그 세상이다. 과거가 그래 왔다. 이러므로 당신이 세상을 달라지게 하려면은 당신부터 스스로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
열린우리당은 4·15총선의 정치적 승리로 웃음꽃이 만발하다. 청와대도 ‘정중동’의 활기를 띤다. 텔레비전 화면에 당신의 모습이 갑자기 많이 비추기 시작한다. 좌파가 득세한 총선이기도 하다.
총선 패배를 자위하는 정당도 있고 쑥대밭이 된 정당들도 있다. 시대의 반영이다. 시대는 멈추지 않는다. 관객은 무대를 바꾼다. 언젠가는 변하는 게 또한 시대다. 당신은 지금 웃고 있는가, 당신은 지금 울고 있는가.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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