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칼럼/헌재 선고를 앞두고...

아직도 기억한다. “나 모르게 그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였다. 지난 3월12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의결되기 바로 전날 대통령은 그랬다. 텔레비전으로 생중계 된 그 자리는 대국민 입장 표명의 자리였다. 측근비리를 말하면서 그가 재벌 기업에서 받은 돈의 일부로 아파트를 샀다는 검찰수사 보도는 사실과 다르다고 까지 해명했다. 새 아파트를 사면서 전에 살던 집의 매매대금이 제때 빠지지 않아 우선 기업에서 받은 돈으로 지불하고 나중에 받은 매매대금으로 충당했다는 것이다.

이런 저런 내용의 측근비리와 선거법위반 그리고 경제파탄 등이 심판 사유로 된 헌법재판소 선고가 대통령 직무정지 60여일만인 내일 열린다. 법률심리, 사실심리, 정황심리의 심증형성이 어떻게 판단될 것인지는 전적으로 재판관들의 자유심증주의 권한에 속한다. 그러나 소수의견을 개진하지 않을 것이라는 건 책임의 은둔이며 도피다. 소추를 인용하여 나라의 대통령을 파면하느냐, 소추를 기각 또는 각하하여 복귀시키느냐 하는 재판이다. 역사에 기록된다. 이토록 책임이 막중한 합의제 재판이 가부간에 전원 일치의 9대0이나 0대9가 아닌 이상에는 단 1명일 지라도 다른 소수의견이 있으면 결정문에 개진돼야 하는 것은 역사적 공식문서의 정확한 기록이 돼야하기 때문이다.

임명직의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민선직인 대통령을 심판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정신나간 주장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헌법기관이다. 국회의원 등 각급 민선직의 비리를 임명직 법관이 재판하는 것도 법관 또한 헌법 기관이기 때문인 것이다.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탄핵소추가 계류된 뒤 경찰의 각별한 경호를 받았던 것으로 안다. 이 연유가 대중집회의 위세가 미친 신변 안전의 우려에 있었다면 참으로 불행한 사실이다. 물론 재판관들은 심증형성에 그런 영향을 받지 않겠지만, 객관적 관점이 그렇게 보일 수 있는 것은 선고의 권위와 무관하기 어려운 사실을 간과하기가 심히 어렵다. 선고를 예단하는 언행이나 일정을 잡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정이 이런 터에 소수 의견을 결정문에서 묵과키로 하는 것은 헌법재판소의 권위를 위해 더욱 바람직 하지 않다. 만약 소수 의견이 있는 데도 이를 밝히지 않아 비록 당장은 모른다 하여도 결국은 다 밝혀지게 마련이다. 기왕 이럴 바에는 재판관 누구는 이렇게 판단하였고 또 누구는 저렇게 판단하였다는 내용을 결정문을 통해 공개하는 것이 소신에 책임을 지는 재판관다운 당당한 자세인 것이다. 국론 분열을 우려한다는 해명은 설득력이 약하다. 오히려 무성한 추리와 루머로 혼돈을 더 할 우려가 높다.

불법과 부당함은 본질이 다르다. 탄핵 소추안의 국회 의결은 관점에 따라 부당하다는 비판은 있을 수 있으나 의결 자체를 불법으로 보는 주장은 참으로 황당하다. 더욱 가관인 것은 대통령 소추에 가결 표를 던진 국회의원이 역풍이 불자 ‘잘못했다’며 싹싹 비는 모습이다. 포퓰리즘에 영합하는 것이 반드시 진리인 것은 아니다. 역사의 이런 사례는 많지만 여기선 그만 둔다. 고독해도 소신과 신념을 가질 줄 아는 정치인의 정치생명이 대중영합주의 보다 멀리 보아 더 길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고 이를 탓하여 미래를 망치는 것은 어리석다. 헌법재판소의 선고가 어떻게 나든 이젠 탄핵정국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동을 걸어야 한다. 헌법재판소 선고에 불복의 시비를 거는 것도 소용없고 누굴 원망하는 것도 소용이 없다. 오만과 증오가 얼마나 불행한 가도 알아야 한다. 민중은 지금 말 못할 고초를 겪고 있다. 자성할 줄 몰랐던 그는 자성해야 할 것으로 안다.

/임양은 주필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