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은 우리 민족과 고락을 같이 해 왔다. 풍년이 들면 배를 두들기고 임금의 덕을 칭송했지만 대흉년이 들면 임금의 덕이 없어 하늘이 노했다며 인심이 흉흉해졌다. 농민들은 한 톨의 쌀이라도 더 거두기 위해 벼를 자식처럼 귀하게 돌보고 산비탈에 한 뼘도 안되는 다랑논을 일구기도 했다.
쌀은 지구촌 30억명의 주곡이다. 세계 농촌에서 벼는 10억여 명의 생계를 책임지는 소득원이다. 그래서 쌀은 문화이며 경제다, 과거이며 오늘이자 미래이다. 무엇보다 쌀은 삶의 문화이다. 노동집약적인 벼농사를 짓는 곳에선 세계 어느 곳이든 오랜 세월에 걸쳐 ‘공동노동’의 전통이 뿌리내려 왔다. 공동노동을 통해 문화권을 통합하는 구실도 해 왔다.
쌀은 사람들한테 민요와 그림, 설화와 속담, 그리고 지역축제들을 만들어 줬다. 쌀의 다양한 맛과 색깔을 즐기는 무수한 토속요리법들이 세계 여러 나라, 여러 지역에서 생겨나 지역공동체의 문화를 풍부하게 해 주고 있다.
습지인 논은 벼를 중심으로 한 생태계의 생물 다양성을 지켜온 공간이기도 하다. 쌀을 생산하는 벼는 탄소동화작용을 하면서 지구 표피에 서식하는 식물 중 가장 많은 양의 산소를 공급한다. 또한 가장 많은 양의 탄산가스를 흡수함으로써 이중으로 대기를 정화하여 공기를 신선하게 한다. 우리 나라 벼농사에서 방출되는 산소의 양은 연간 1천 19만t에 이른다. 산소를 방출함으로써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여 사람들에게 기여하는 정서적 공익기능을 더한다면 그 가치는 경제적인 차원을 넘어선다.
논의 수자원 함양기능
사람이 생활하는 데 물의 중요성은 두 말 할 나위도 없다. 우리가 사용하는 물의 가장 크고 귀중한 저장고는 바로 지하수다. 그래서 지하수를 물의 마지막 보고(寶庫)라고 말한다. 논은 벼를 재배하기 위해 물을 받아 두는데 이 논물의 약 45% 정도가 지하로 스며들어 우리 인간의 일상생활에 가장 필요한 맑고 깨끗한 지하수를 형성한다. 우리 나라 논에서 만들어지는 지하수의 양은 대략 연간 350억t 정도로 전체 국민이 연간 사용하는 물 사용량의 약 80%에 해당한다. 앞으로 더욱 늘어날 물 수요량의 충당을 위해서는 지하수에 의존하는 비율이 높아질 수 밖에 없다. 논의 수자원 함양 기능은 더욱 소중해 진다.
우리 사회도 쌀과 함께 큰 변화를 거쳐 왔다. 1960년대까지 빈곤의 상징이었던 ‘보릿고개’가 ‘통일벼’의 출현으로 무너졌다. 1971년 아열대 재배종인 ‘인디카’와 온대 재배종인 ‘자포니카’를 교잡해 개발한 다수확 통일벼 1호에 의해 보릿고개는 옛말이 됐다.
농촌의 모습도 바뀌었다. 농지에 아파트단지들이 들어서 하루가 다르게 농민도 줄어들고 있다. 근자에는 쌀이 남아 돈다고 정부마저 쌀 경작을 소홀히 하고 있다. 흉년이 들어도 재고량이 많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천하태평이다.
농촌환경의 위기 도래
그러나 그렇지 않다. 지난해 기상 이변으로 미국, 중국 등의 곡물생산이 급감, 세계 전체의 곡물 재고율이 1984년 이후 최저수준으로 하락하고 곡물가격은 20년 이래 최고 수준까지 폭등하고 있다. 올해에도 곡물 생산이 지난 해 수준에 머물 경우 세계적인 식량위기가 발생한다. 특히 우리 나라의 경우 지난해 대흉작으로 2002년말 1천만 섬에 달했던 쌀 재고가 올 연말에는 600만섬대로 급감한다. 식량위기가 없다 할 수 없다.그런데도 외국 쌀 수입하면 된다고 무대책이 대책이다. 기가 막히는 농정이다.
더구나 올해 9월 우루과이라운드 농업협정에 따른 쌀 재협상이 예정돼 있다. 유엔이 올해 2004년을 ‘세계 쌀의 해’로 정하고 “쌀은 삶이다”라고 선언했지만 쌀 개방 확대는 곧 우리 전통문화의 위기이며, 농촌환경의 위기임을 알아야한다.
“우리 목표는 농민부터 과학자까지 모두 지구공동체가 가능하며 평등한 방식으로 ‘쌀의 증산’이라는 사명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라는 유엔의 선언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쌀은 증산돼야 한다. 쌀은 삶이요, 미래이기 때문이다.
/임병호 논설위원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