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뱀의 꼬리를 자른다고 도마뱀이 없어지나. 도마뱀의 꼬리는 도마뱀이 현장에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밖에 되지 않는다” 소위 ‘안풍(安風)’사건 항소심 재판부의 노영보 부장판사가 5일 강삼재 전 국회의원과 김기섭 전 안기부 운영차장에 대한 무죄 판결문을 읽어내려 가던 중 한 말이다. ‘안풍’자금의 출처를 사실상 김영삼 전 대통령(YS)으로 지목하면서 법정 증언을 거부한 YS를 질타한 속내다. 여기서 도마뱀은 YS, 꼬리는 김기섭 전 차장을 뜻한다.
대검 중수부가 2001년 1월 “1995년 지방선거와 1996년 15대 총선 때 강삼재 당시 신한국당 사무총장과 김기섭 안기부 운영차장이 공모해 안기부 예산 1천197억원을 선거자금으로 유용했다”며 두 사람을 ‘국고 손실’혐의로 기소한 ‘안풍사건’재판의 최대 쟁점은 자금 출처였다. 그런데 ‘안풍’사건 항소심에서 재판부가 ‘안풍’자금을 사실상 YS의 비자금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김기섭 전 안기부 차장이 관리해 온 안기부 계좌들의 1993년 연초 총 잔고가 616억원이었던 것이 YS가 취임한 지 불과 10개월 만인 12월말 1천909억원으로 급증한 점으로 볼 때 잔고의 차액은 YS 비자금으로 볼 수 있다고 재판부는 밝혔다.
강삼재 전 사무총장이 청와대에 가서 당무보고를 마치면 YS가 “(지갑을)가져와 봐”라고 했고, 1억원짜리 수표를 수십억원에서 200억원까지 다발로 지갑에 넣어 주었다는 것은 이미 세상에 다 알려진 사실이다. YS가 엄청난 비자금을 자기 재산을 털어서 만든 것은 아닐 게다. 대선자금이든 당선축하금이든, 전정권으로 부터 물려받은 통치자금이든 구린내 나는 검은 돈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지난 날 YS는 “재임 중 기업 돈을 한 푼도 받지 않았다”고 호언을 일삼았다.
‘안풍’사건이 무죄판결이 난 이후 YS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6일엔 평소와 다름 없이 아침 상도동 자택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실내 배드민턴장에서 동호인들과 어울렸다. 중간에 경호 관계자가 “취재기자들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보고하자 YS는 “한 마디도 안할 끼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배드민턴 운동을 마치고 나온 후 기자들이 “어젯 밤에 잘 주무셨느냐”고 묻자 “너무 잘 잤지 뭘”하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고 한다. ‘그런 일로 잠 못 잘 내가 아니다’라는 소리로 들린다. 가히 오불관언(吾不觀焉)이다.
그러나 YS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도 비자금 사건으로 처벌 받았고 전두환 전 대통령은 백담사에서 귀양살이도 했다. 또 지금까지 비자금을 추징 중이다. YS를 조사하지 않는 것은 형평성에서 맞지 않는다.
대선자금이나 당선축하금 이라면 포괄적 뇌물죄를 적용해야 할 상황이다. 당장 조사에 들어가야 한다. 안기부 돈이 아니라고 해도 예산 회계에 잡히지 않는 돈이 국고수표 형태로 나간 것은 중대한 국가문란행위다. 통치자금일 가능성이 높다면 어디서 받았는지, 어떻게 돈세탁을 했는지 등을 YS를 상대로 철저히 수사해야 한다.
현직 대통령의 불법 대선자금까지 수사한 검찰이다. 꿀릴 게 없다. YS의 1천억원대 불법자금 사용혐의를 수사하지 않는다면 명분에도, 논리에도 맞지 않는다. YS를 직접 수사해 자금의 성격을 명확히 가린 뒤 그에 따른 형사책임을 물어야 한다. 재임시 ‘역사 바로 세우기’를 유난히 강조한 YS다. 대선 잔금이었는지 당선 축하금이었는지, 별도 모금한 자금인지 가장 잘 알고 있을 게다.
‘안풍’사건 재판이 진행 중이던 지난 4월21일 법정 불출석사유서를 통해 “재임 중 돈을 받은 적도, 준 적도 없다”고 거듭 강조했지만, 법원 판단이 달라진 만큼 진실 그대로 털어놓고 검찰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 그 길이 바로 YS가 즐겨쓰는 ‘대도(大道)’다.
대법원 상고심에 부쳐지면 혹 결론이 또 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국민 앞에 고해성사하고 용서를 구해야 마땅하다. “한 마디도 안할 끼다”는 이제 통하지 않는다. 침묵과 ‘모르쇠’는 엄연히 다르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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