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느가 선택한 영화 ‘엘리펀트’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2번 ‘월광’의 친숙한 멜로디가 배경음악으로 감미롭게 깔리는 가운데 시리도록 푸르고 맑던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면서 암흑으로 변한다.
마치 불길한 일이 벌어질 것을 암시라도 하는 듯하다. 그 날의 학교 풍경도 다른 평온한 날과 다를 바 없었다.
운동장에서는 학생들이 미식축구를 하고 치어리더들은 응원 연습을 하느라 여념없다.
‘동성애와 이성애의 대화 모임’에서는 지도선생을 중심으로 남녀학생들이 성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고, 다른 교실에서는 물리학 수업이 한창이다.
식당은 음식이 먹을 게 없다고 투덜거리며 식사를 하는 학생들로 북적거린다.
식당 종업원 2명이 요리를 하다 말고 청결규정을 어겨가며 몰래 담배를 피우는 모습도 엿보인다. 도서관에는 책을 읽는 학생들이 눈에 띈다.
분주하게 돌아가는, 너무나 일상적인 학교생활이 무심하게 펼쳐진다. 이런 평화로운 곳에서 폭탄이 터지고, 총알이 날아가면서 12명의 학생과 교사 1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수십명이 부상당하는 충격적인 총격사고가 터질 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오는 27일 개봉하는 ‘엘리펀트’(Elephant·㈜동숭아트센터 수입ㆍ배급)는 지난 1999년 4월 20일 미국 콜로라도 리틀톤의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끔찍한 총기 난사사건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소재로 다룬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이나 폴 F.라이언의 ‘홈 룸’, 벤 코치오의 ‘제로 데이’ 등과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인 학생들의 시선으로 총격사건 전후 16분간의 상황을 차가울 정도로 차분하게 담고 있다.
집단 괴롭힘과 따돌림 등 범행동기를 파헤치거나 손쉬운 총기구매 시스템이나 폭력적 비디오게임과 TV, 사탄숭배 등 미국사회의 모순을 고발한다든가 하는 일 따위는 않는다.
카메라는 줄곧 학생들의 뒤를 쫓아가며 그들의 모습을 교차해서 보여줄 뿐이다.
알코올 중독인 아버지 때문에 마음 고생이 심한 존은 지각해서 교장선생님에게 꾸중을 듣고, 사진찍기가 취미인 일라이는 나뭇잎이 물든 완연한 가을 교정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친구들을 카메라에 담기 바쁘고, 소심한 성격의 미셸은 다른 학생들에게 멍청이라는 놀림을 받으며 따돌림을 당하고, 다이어트에 여념이 없는 치어리더 무리는 잘 생긴 미식축구선수 네이선을 보고 호들갑을 떤다.
총기를 난사한 당사자들인 알렉스와 에릭도 그 날 오후 집에서 컴퓨터게임을 하고 ‘엘리제를 위하여’를 피아노로 연주하는 등 무료한 시간을 보내다 인터넷 총기구매사이트를 통해 주문한 총을 배달받고 함께 샤워를 한 뒤 집을 나선다. 둘은 치밀하게 짠 범행계획에 따라 학교에 들어가 무차별적으로 총을 쏴 학생들을 죽인다.
이 영화는 ‘드럭스토어 카우보이’, ‘아이다호’, ‘굿 윌 헌팅’, ‘파인딩 포레스터’ 등을 통해 젊은이들의 상실감을 탁월한 감수성으로 그려낸 거스 반 산트 감독이 자신이 살았던 미국 포틀랜드에 있는 폐교된 고등학교에서 20일 동안 350만달러의 저예산으로 찍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지난 2003년 칸국제영화제에서 최고 영예의 황금종려상은 물론 감독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상영시간 81분. 등급은 미정.
■알포인트
감미로운 男 감우성, 공포 장전!
“손에 피를 묻힌 자는 돌아가지 못한다.”
오는 20일 개봉하는 ‘알포인트’(씨앤필름 제작·시네마서비스 투자·배급)는 베트남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72년 실종된 한국군을 찾으러 나섰던 수색부대가 눈에 보이지 않는 적에 의해 극도의 불안과 공포 속에 죽어가는 상황을 그리고 있다.
영화는 6개월 전 작전 지역명 R-포인트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당나귀 부대원으로부터 구조를 요청하는 무전신호가 사단본부로 걸려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벌써 3번째다. 병사들의 생존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수색부대가 편성된다. 군사작전에 나갔다하면 항상 피를 보는 소대장 최태인 중위(감우성)를 비롯해 모두 9명의 군인이 수색에 나선다.
고향집 부모님에게 송아지를 사드리기 위해 형을 대신해 16살에 군에 입대, 베트남전에 참전한 장영수 병장(오태경), 한때 잘 나가던 시절을 회상하며 하루 빨리 임무를 끝내고 귀국선에 오르기를 바라는 박재영 하사(이선균), 집에 돌아가면 아이와 마누라 손잡고 창경궁(당시 창경원) 나들이가는 게 꿈인 마원균 병장(박원상) 등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말년의 군인들이 합류한다.
이들이 들어간 곳은 베트남 호치민(당시 사이공) 서남부 150㎞ 지점의 캄보디아접경지역 섬으로 베트남전 당시 군사작전명 ‘로미오 포인트’로 불렸던 전략요충지. 원래 커다란 호수가 있던 이곳은 옛날 중국군이 쳐들어와 베트남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였던 참살의 현장으로 베트남은 죽은 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피로 물든 호수를 메우고 사원을 세우는 등 신성한 곳으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햇빛조차 잘들지 않고 항상 안개가 끼어 있어 습하고 음침한 곳이다. 영화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바로 이 부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베트남 사람조차 접근하기를 두려워하는, 원혼이 떠도는 곳. 그곳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전제 아래 영화는 출발한다.
수색 소대원들이 귀신에 씌이는 빙의현상으로 점점 미쳐가면서 서로 총을 겨누고 칼을 휘두르며 자멸하는 것은 신성불가침 지역을 침범한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고 영화는 말하는 듯하다.
‘알포인트’는 전쟁이 초래한 광기를 공포 소재로 끌어들여 호러영화의 영역을 넓혔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하얀전쟁’, ‘텔미 썸딩’, ‘링’ 등의 시나리오를 쓴 공수창 감독의 장편 데뷔작. 15세 이상 관람가. 상영시간 106분.
■프레디vs제이슨
‘나이트메어’의 프레디와 ‘13일의 금요일’의 제이슨. 공포영화의 대명사격인 이들 영화 속 공포 캐릭터들이 대결을 벌인다면? 황당무계한 상상같지만 영화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무적의 두 살인마가 맞붙었다고 공포감이 두 배로 증폭될 것이라는 기대는 갖지 않는 게 낫다. 오는 27일 개봉 예정인 ‘프레디 vs 제이슨’은 공포영화를 표방하고 있지만 내용은 오히려 슬랩스틱 코미디에 가깝다. 가벼운 마음으로 엽기 호러 코믹 쇼 한 편 본다는 기분으로 즐기는 게 정신건강에 이로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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