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칼럼/다음에는 또 뭔가?

세상이 다 아는 친북단체다. 재판을 못받겠다고 버틴다. 대통령이 국가보안법 폐기를 선언했으니 그런 법으로는 재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인터넷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의 백두산 전설집’이 떴다. 수령님이 백두산을 근거로 항일투쟁을 할 당시 장군께서 백두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는 것이다.

국가보안법을 폐기하여 박물관에 보내야 한다는 말이 나온지 사흘이 멀다하고 이런 일이 생겼다.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앞으로는 더 괴상한 일이 생길 지 모른다. 공산당을 허용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 거라고 단언하기가 심히 어렵다. 이 경우엔 틀림없이 양심의 자유를 팔 것이다. 양심의 자유는 곧 사상의 자유라고 주장할 게 뻔하다.

그러나 헌법이 양심의 자유를 보장한 건 틀림이 없지만 이에앞서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영토의 주권을 해치는 양심의 자유는 자유로서의 존립이 불가능하다.

국가보안법을 형법으로 대체 보완한다고 말인즉슨 쉽게 한다. 국가보안법은 특별법이고 형법은 일반법이다. 그 기능이 다르다. 대체 보완의 한계가 불가피하다. 무엇보다 위헌의 소지가 생긴다. 이래서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헌법은 뜯어 고쳐야 한다는 말이 또 안 나올는 지 모르겠다.

법리적으로 볼게 아니라 역사의 결단으로 보자고 한다. 법치국가다. ‘국헌을 수호하겠다’고 취임선서를 했다. 법리를 무시하면 국헌 수호의 의무를 저버린다. 역사의 결단이라니 무슨 결단을 해야 한다는 건지 도시 알 수가 없다. 민중은 그 누구에게도 혼자 역사의 결단을 내리라고 위임한 사실이 없다.

헌법재판소는 국가보안법을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대법원은 국가보안법상 찬양 고무죄 사건의 상고심에서 유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 판결했다. 헌법재판소나 대법원은 헌법기관이다. 국가조직이다. 시스템을 무시하는 ‘박물관’ 말씀은 듣기에 정말 민망하다.

듣기에 따라선 헌법재판소나 대법원 구성원은 박물관에 보내야 한다는 것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한술 더 떠서 누군가는 대법원을 향해 “청산해야 될 수구세력”이라고 힐난했다. 독선이다. 루이 16세는 ‘짐이 국가’라고 했다. 반대의 목소리는 기득권층의 수구세력으로 매도하는 이분법적 시각은 위험한 독선이다. 독재와 독선은 무늬만 다를 뿐이다.

국가보안법이 독재정권에 악용됐던 점을 모를 사람은 없다. 인정한다. 그러나 국가안보에 기여했던 점도 인정해야 한다. 평양정권이 왜 기를 쓰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집요하게 요구하는 지를 깊이 헤아릴 필요가 있다. 이 법이 잘못 쓰였던 일은 수십 년 전의 일이다. 남북교류는 마땅히 활성화 해야 하지만 이쪽은 이쪽 체제가 있고 저쪽은 저쪽 체제가 엄연히 다른 것은 분단 이후 줄곧 지속된 현실이다. 호랑이 담배먹던 옛 일을 가지고 현실을 재단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다.

서울 동작동 국립묘역에는 저들의 남침으로 한창 나이의 젊은 목숨을 잃은 참으로 수많은 국군 장병이 잠들어 있다. 나라가 이렇게 될 바엔 뭣 때문에 그토록 목숨을 바쳤는가 하고 영령을 분노케 하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

지근의 한 실세 중진은 “노무현 대통령의 개혁은 혁명적이다”라고 했다. 실감한다. 혁명적이기 보다는 가히 쿠데타적 시도다. 그러나 개혁의 성과적 실체는 없다. 개혁을 두려워할 이유도 없다. 문제는 좌파 편향의 개혁은 성공할 수 없는 데 있다. 건국의 토양과 민중사회의 뿌리는 그게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이 정권의 강경파 가운데 나라와 민중을 계급사관과 투쟁론의 낡은 이념에 개혁의 초점을 두는 이가 있다면 크게 각성해야 한다.

정권은 실험 도구가 아니며 민중은 실험대상이 아니다. 이 다음엔 또 뭐가 나올 것인 지 주목하고자 한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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