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仲燮

반 아이크와 얀반 아이크는 14세기 중엽 네덜란드의 형제 화가다. 북유럽의 르네상스를 개막했다. 이들의 대작으로 꼽히는 ‘신비의 어린 양’은 형이 그리다가 죽자 동생이 이어받아 6년에 걸쳐 완성한 작품이다.

건축가로 로마 베드로 성당의 걸작을 남긴 미켈란젤로는 또 기독교미술의 거장이다. 그의 최후 조각품 ‘론다니니의 피에타’는 89세의 작품이다. 죽기 엿새 전까지 이 조각을 위해 대리석상을 팠다. 고령에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보인 ‘론다니니의 피에타’는 최후작이기 보단 미완성의 유작이라 할 수 있으나 큰 평가를 받고 있다.

프랑스 화가 들라크로아의 작품은 처음엔 ‘술취한 사람이 회화의 물통을 캔버스에 부딪혀 빗자루로 휘둘러 그린 것’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격한 색채, 자유 분방한 화풍은 결국 19세기 낭만주의 예술의 대표적 화가로 추앙받았다. 1863년에 죽은 후다. ‘만종’(晩鐘) 등을 남긴 농민화가 밀레의 작품이 제대로 빛을 보게 된 것도 그의 사후다. 물랭 루즈의 석판화가 높이 평가된 것은 1901년 36세로 요절한 뒤다.

‘게르니카’는 1937년 스페인 내란 때 나치 독일이 무차별 폭격을 가해 2천여 명의 민간인 사상자를 낸 참사를 추상화 한 20세기 최대의 화가 피카소 작품이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북부 소도시로 포격이 가해졌던 지명이다. 이 그림이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돌아간 것은 1981년이다. “스페인에 민주화가 이룩되면 돌려주라”는 스페인 출신의 피카소 유언에 따라 그가 죽은지 6년만이다.

대향(大鄕) 이중섭의 그림이 그의 일본인 부인 등 유족들에 의해 바다 건너와 국내에서 높은 가격으로 경매됐다. 유족들은 ‘이중섭 타계 50주년 기념사업’을 위해 소장하고 있던 작품 수점을 국내 미술시장에 내놨다. 그중 ‘아이들’(새로 24㎝ 가로 19㎝)은 3억1천만원에 낙찰됐다. 대향의 그림은 야수파의 영향을 받은 굵은 선으로 대담하게 시도한 단순화 화풍이 높게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평양에서 월남해 6·25동란을 겪는 동안 대구에 살면서는 극심한 생활고를 겪었다. 다방에서 담뱃갑에 소나 인물 등을 그리며 시간을 때우곤 했다. 1956년 마흔의 나이로 타계했다. 천재 화가는 생전에 고생을 하고 천재 작품은 사후에 빛을 뿜고 있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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