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의자
일단 영화에는 녹색의자가 등장하지 않는다. 녹색의자에 대한 언급도 없다. 그런데 왜 제목은 녹색의자일까. 이에 대해 박철수 감독은 “녹색은 내 판타지다. 또 개인적으로 의자를 굉장히 좋아한다. 의자는 내 콤플렉스이기도 하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이 두 가지 이미지가 영화 속에서 조화를 이루기 바랬다. 물론 영화 속에서 녹색의자를 찾으려면 없다. 그것은 내 의식 속에 있다”고 말했다.
말 장난 같지만 박 감독의 이러한 태도는 어떤 식으로든 관객들에게 녹색의자에 대한 관념적 해석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것이 섹스어필이든, 휴식이든, 안정이든 말이다.
이 영화는 확실히 독특하다. 32세 유부녀와 19세 고등학생이 눈 맞은, 질펀하고도 위험한 사랑 이야기인 줄로만 알고 극장에 들어갔다가는 별천지를 경험할 수도 있겠다.
영화는 진한 멜로인 동시에 심리 치료극이고 황당한 만담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스토리의 굴레를 벗어나 형식미와 실험주의를 파고든 박 감독은 이번에도 역시 거침없다. 이야기는 분명 두 남녀의 금기된 사랑을 그리지만 영화는 어디로 튈 지 모르는 공처럼 튀어오른다.
질펀한 정사가 숨돌릴 틈 없이 대담하게 펼쳐지다가 “내가 한때 ‘화산고’라는 영화에 출연할 뻔 했어요”라며 남자 주인공이 난데없이 텀블링을 한다.
둘을 추적하는 주간지 기자의 모습이 희화화되고, 둘의 ‘비정상적인 관계’에 대한 심리치료극이 파티의 형식으로 펼쳐진다. 이러한 ‘난데없음’은 필름이 툭툭 끊기는 듯한 효과(?)를 준다.
박철수 감독은 “굉장히 의도적으로 유치함을 강조했다. 영화 만드는 이와 보는이의 시선이 반드시 일치할 필요는 없지 않나”면서 ”극단적으로 말하면 파티 장면 하나를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영화는 2000년 12월 실제로 발생한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30대 유부녀가 남자 고등학생과 성관계를 가진 후 구속된 사건이었다. 박 감독은 신문 사회면의 기사에서 출발, 유부녀가 감옥에서 나온 이후의 상황을 풀어냈다. 사회봉사 100시간의 명령을 받고 출소한 문희(서정 분)의 앞에 현(심지호 분)이 나타난다. 현은 운전면허를 딸 수 있는 연령이 되려면 앞으로도 28일이 남은, ‘여전히’ 미성년자다.
둘의 행동이 사랑인지 아닌지는 영화 막판 펼쳐지는 와인 파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양측 가족과 문희의 전 남편 등이 등장하는 이 시퀀스는 흡사 100분 토론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며 황당하면서도 독특한 재미를 준다. 무척 진지한 것 같으면서도 너무도 가볍다.
박 감독은 “적당히 나이든 감독이 성을 통한 조크를 했다고 생각해달라”고 말했다. 그말이 정답이다. 10일 개봉, 18세 관람가.
△미스터 & 미세스 스미스
거두절미하고 스타 캐스팅의 묘미와 파워를 깔끔하게 증명해 보이는 영화다.
브래드 피트(42)와 안젤리나 졸리(30). 세상을 사로잡은 두 선남선녀의 화끈하고 섹시한 로맨틱 코미디에 구구절절 설명은 여름날 외투처럼 거추장스럽다. 게다가 ‘본 아이덴티티’의 덕 리만 감독은 두 스타의 우성인자를 극대화해 모양새뿐 아니라 맛도 좋은 오락영화를 만들었다.
도입부부터 매력적이다. 결혼 6년차, 부부 클리닉 상담을 받고 있는 스미스 부부의 모습이 산뜻하게 카메라에 잡힌다. 마치 쇼윈도에 진열된 명품 같은 모습. 그러나 둘의 얼굴에서는 참을 수 없는 권태가 묻어난다. 천하의 섹시 스타 피트와 졸리가 이렇듯 부부라는 이름으로 조용히 ‘으르렁거리는’ 모습은 진공청소기처럼 관객을 순식간에 흡입한다. 각각 60명과 312명을 저 세상으로 보낸 킬러들이지만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것이다.
존 스미스와 제인 스미스는 베테랑 킬러다. 그러나 둘은 서로의 신분을 모른다. 첫눈에 반해 결혼에 골인한 둘은 각자 상대방에게 건축업자와 컴퓨터 전문가라는 직업으로 위장한다.
그런 둘이 동일한 표적 사냥 현장에서 맞닥뜨린다. 결혼 6년만에야 신분이 탄로난 것. 기막히고 코막힌 상황도 잠시. 둘에게는 각각 48시간 내에 상대 킬러를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권태기의 부부는 서로에게 무지막지한 총질을 해댄다.
리만 감독은 ‘본 아이덴티티’에서 갈고 닦은 액션 연출 기술을 이번에도 효과적으로 살렸다. 존과 제인이 사용하는 무기는 여느 액션 블록버스터 못지 않은 최첨단. 그중 엉성한 시장가방 같은 졸리 핸드백의 변신은 압권.
이 영화는 어디까지나 로맨틱 코미디인 것. 이렇듯 박진감 넘치는 전개 속에서도 화면에서는 시종 패션쇼가 펼쳐진다. 흰색티 하나를 걸치고 있어도 눈이 부시는 두 주인공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꽤나 멋을 냈다.
그러나 이러한 화려한 볼거리를 능가하는 흥행요소가 있으니 바로 아내에게는 언제나 한수 아래인 어리숙한 피트의 모습이다. ‘트로이’의 아킬레스가 아내 앞에서 쩔쩔 매는 설정은 극적 재미를 극대화한다.
베스트 킬러지만 언제나 아내 보다는 한발씩 늦는 피트의 모습은 지금까지 그가 맡아온 캐릭터 중 가장 살갑고 친근하게 다가온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내를 진정 사랑하기 때문에 지고 들어가는 것. 결정적인 순간마다 졸리에게 양보를 하거나 그녀를 배려하는 피트의 모습이 스크린 곳곳에 배치돼 있다.
킬러끼리의 허황한 총질에 그칠 수도 있는 영화가 땅에 발을 붙이는 것은 이렇듯 피트의 눈에 사랑을 채운 덕분. 여심(女心) 공략에 이보다 좋은 무기는 없다. ‘킬빌’에서 잔혹함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로맨스를 가득 채워넣었다고나 할까. 마사 스튜어트가 꿈꾸는 예쁜 가정에 대한 판타지를 비꼬는 각종 장치와 “여자는 우리 엄마밖에 못 믿어”라는 동료 킬러의 대사도 감칠맛난다. 부부의 성이 ‘스미스(Smith)’인 까닭도 귀엽다. 17일 개봉, 15세 관람가.
△‘천군’ ‘청연’ ‘태풍’ 어깨가 무겁다
하반기 블록버스터들의 어깨가 무겁다. 이들의 성패가 영화계 돈 가뭄 현상에 무시못할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현재 개봉 대기 중인 블록버스터는 ‘천군’(감독 민준기, 제작 싸이더스), ‘태풍’(감독 곽경택, 제작 진인사필름), ‘청연’(감독 윤종찬, 제작 코리아픽쳐스). 이중 ‘천군’의 개봉일이 7월 15일로 최근 확정됐다. ‘태풍’과 ‘청연’은 연말에 격돌할 전망이다. 이들의 어깨는 지금 상당히 무겁다. 가뜩이나 ‘시장’이 예년 같지 못한데다가 앞서 개봉한 대작들의 성적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기 때문.
제작비 85억원이 든 ‘남극일기’는 지난 5일까지 100만명이 들었다. 극장에서 모아야하는 손님의 1/3 밖에 모으지 못했는데 벌써 퇴장 준비를 하고 있다. 그에 앞서 지난해 12월 선보인 100억원 대작 ‘역도산’도 극장에서 쓸쓸히 퇴장했다. 이렇다보니 올해 남은 세 작품에 대한 시선도 낙관적이지 않다.
-천군 제작비는 85억원이다. 박중훈, 김승우 등이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이순신을 소재로 한 사극 판타지극이라는 설명이 대단히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방황하던 청년 시절의 이순신을 새롭게 조명한 이 영화의 시도는 재기발랄함과 위험천만함 사이를 걷고 있다. 광화문에 서 있는 늠름한 이순신이 아니라 봉두난발 좌충우돌 이순신이라는 발랄한 소재를 얼마만큼 힘있고 진실하게 끌고 갔느냐가 성패를 좌우할 듯.
-청연에도 기대가 쏠린다. 일련의 블록버스터들 중 유일하게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영화는 한국 최초의 여류 비행사 박경원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다. 장진영과 김주혁이 주인공을 맡아 미국 일본 중국을 누비며 촬영했다. 경비행기가 주요 소재인만큼 CG 등 후반작업에 돈이 많이 들어가 이미 제작비가 100억원을 넘어섰다.
-태풍 무려 150억원이 투입된다. 지금까지 제작된 한국영화 사상 최대의 제작비. 장동건, 이정재라는 걸출한 스타에 곽경택 감독의 조합이 기대감을 드높이지만 이 영화라고 걱정을 비켜갈 수는 없다. 한반도에 테러를 감행하려는 해적과 이를 저지하는 해군 장교의 대결을 그린 액션 블록버스터. 그나마 대규모 액션 신이 많아 블록버스터로서의 모양새는 가장 갖췄으나 드라마가 살지 못하면 액션도 빛을 발하지 못하니 끝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다. 현재 75% 촬영이 진행됐다.
이들 블록버스터가 하늘에서 제대로 터져 돈벼락을 내릴 것인지 아니면 불발탄으로 그칠 지, 지금 영화계의 이목이 집중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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