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병 위령탑

우리 국민들은 6·25 전쟁 때 생포됐거나 전사한 북한군 ‘어린 병사’는 안타까워 하면서도 국군의 일원인 ‘소년병’은 잘 모른다. 김일성이 어린 아이들을 전선에 총알받이로 내몰았다고 비난하면서 이승만이 소년병을 전선에 투입시킨 것은 말하지 않는다.

소년병은 학도병 중 징집연령 18세 미만인 14~17세의 어린 병사다. 6·25 전쟁 당시 2만여 명의 소년병들이 키 보다 더 큰 총을 들고 전쟁에 뛰어 들었다. 6·25 전쟁 때 ‘다부동(多富洞)전선’은 개전 후 두 달도 안돼 낙동강까지 밀린 국군과 유엔군이 대구의 관문에 구축한 최후의 방어선이다. 이 다부동 전투에서 국군 쪽에서만 매일 500~6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소년병들도 매일 죽거나 다쳐 나갔다. 소년병들은 자원해서 전장에 나온 만큼 앞 뒤 가리지 않고 싸웠다.

1950년 8월 10일 벌어진 포항여중 앞 벌판 전투에서는 국군 제3사단 소년병 71명이 전멸했다. “어머니, 지금 제 옆에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 듯이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볕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겨우 71명 입니다. 어쩌면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포항여중 앞 벌판 전투에서 전사한 이우근 소년병(서울 동성중학교 출신)의 헐렁한 군복 주머니에서 발견된 편지다.

이렇게 순국한 소년병들이 2천464명이나 된다. 그러나 6·25 전쟁이 일어난 지 55년이나 되는데 이 땅엔 소년병을 기리는 위령탑 하나 없다. 살아남은 소년병을 국가유공자로 지정하는 법률안을 2001년 국회에 상정했으나 5년째 외면 당하고 있다. 현행 법률이 국가유공자로 인정하는 경우를 ‘생명 및 신체를 희생 당한 경우’와 ‘예외적으로 그 공적이 인정되는 특별한 기여를 한 경우’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정부는 소년병의 ‘기여’가 ‘특별한 것’이 아닌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지금 생존한 왕년의 소년병은 나이가 가장 적다고 하여도 70세다. 칠순 노병들이 타계하면 소년병을 추모할 전우도 후손도 없다. 정부는 국립묘지 묘역에 ‘소년병 위령탑’을 건립해야 한다. 그것이 국가의 도리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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