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정신 자유를 추구했다. 세속적 번뇌를 피했다. 무욕의 자연생활을 탐닉했다. 이를 위해 사회적 습관을 무시하고 문화적 생활을 경멸했다. 그리스의 퀴닉(Kynik)학파가 이랬다. 견유(犬儒)학파라고도 한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안티스테네가 아류를 이룬 고대 철학의 한 계파다.
퀴닉학파의 Kynik은 그리스어로 개를 뜻하는 ‘Kyon’이 어원이다. 라틴어로는 Cyon에서 Cynic로 옮겨져 개 같은 사람으로 비유된다. 견유학파의 ‘견유’는 개처럼 최저 생활의 자연에 유유자적한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Cynic은 퀴닉학파의 대명사가 되고 냉소적 의미를 지닌 ‘시니컬’(Cynical)이란 말이 나온 유래가 됐다.
알렉산더 대왕이 물통을 집삼은 한 현자(賢者)를 찾아가 “소망이 뭐냐?”고 물었더니 일광욕하는 햇빛을 가리키며 “비켜 달라”고 했다는 유명한 고사를 남긴 디오게네스(BC 400~323)가 대표적인 견유학파다. 디오게네스는 옷 한 벌에 지팡이 한 자루, 괴나리 봇짐 외엔 지닌 것이 없는 생활로 평생을 보냈다. 현대판 퀴닉학파라 할 냉소주의자들이 많다. 이를테면 노숙자들도 냉소주의자들이다. 심각한 것은 지식층의 냉소주의다. 신문도 안보고 텔레비전도 안본다고 한다. 술 자리에서 흔히 나오는 시국담 같은 것에도 외면한다. “그까짓 것 듣고 보고 말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다. “술맛 떨어지는 소리 치우고 술이나 마시자”고 한다.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열심히 보고 시국 얘길 입에 침이 마르게 한다고 해서 세상의 광기(狂氣)가 바로 잡히는 것은 아니잖냐고 한다. 어떤 중소기업인은 골치 아픈 기업 경영을 정리하고 남은 재산으로 취미생활을 즐기면서 여유롭게 보낸다. 그 역시 세상 돌아가는 얘기는 완전히 담을 쌓았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냉소주의 생활이 미덕이었는 지 모르지만 현대 생활에선 그렇지 않다. 냉소적 묵과는 광기를 묵인하는 것이 된다. 무중력 사회가 된다. 사회에 이토록 좌절감을 가져오게 한 것이 이 정권이다. 신바람 나는 것은 정권 계층의 사람들 뿐이다. 가슴 시리도록 밀려드는 냉소감을 극복하는 용기와 지혜를 가져야 하는 것은 후대를 위해서다./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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