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묵 칼럼/회충의 추억

아그놀로 브론치노가 1545년에 그린 ‘마니에리스모’는 세월과 관계가 있다. 그림 속에는 큐피드가 비너스에게 입맞춤을 하고 있고, 그들 옆과 뒤에는 시간의 상징인 모래시계를 든 신과, 진실·쾌락·고통·질투의 신들이 서있다. 주인공들보다는 배경의 인물들을 통해 깊은 의미를 살피게 한 수사법의 작품이다. 도연명의 ‘잡시(雜詩)’ 가운데에도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歲月不待人)는 대목이 끝 부분에 있다.

‘마니에리스모’의 알레고리 수법과 잡시에 담겨있는 뜻은 결코 삶이 순조로운 게 아니며, 따라서 도연명의 시구(詩句)와 같이 세월은 머뭇거리는 순간 달아난다. 8월은 이 나라가 광복을 맞은 60년, 이른바 이순(耳順)이다. 이순이란 경륜을 쌓았으므로 ‘말을 들으면 그것의 오묘함까지 모두 안다’는 뜻이다. 올해의 8월은 유독 여러 가지 일들을 반추하게 된다. 일제말기에 국민학교에 입학한 나는, 기이한 일을 겪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여름이면 바다풀인 해인초(海人草)를 끓여 학생들에게 마시게 했다. 생활수준이 바닥권인 때여서 대부분의 아이들은 회충 등 기생충에 시달렸다. 일제는 식민지 국민을 위한 위생사업의 하나라며, 카이닉산(酸)이 들어있어 구충에 도움이 된다는 해인초의 국물을 학생들에게 제공했다.

그 국물을 마신 아이들은 교문을 빠져나오며 퉤퉤 침을 뱉었다. 비리척지근한 맛과 녹슨 가마솥의 쇳가루가 입안에서 자금거려 비위를 뒤집어 놓았다. 해인초의 효험은 거의 없었다. 교문을 나선 동네의 단짝 가운데 꼬마둥이가 토악질을 했다. 게워낸 음식물에 살팍진 회충 한 마리가 섞여 있었다. 꼬마둥이는 발을 번쩍 들어 올렸다. 발바닥으로 회충을 밟아버릴 기세였다. 녀석은 한참 만에 발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이내 녀석은 흙을 긁어모아 회충의 무덤을 정성들여 붕긋하게 만들어 주었다. 지켜보던 뒤짱구가 까닭을 물었다. 토해낸 회충에게 가해를 하면 뱃속에 든 회충들이 보복을 한다는 게 꼬마둥이의 엉뚱한 대답이었다. 회충들은 이따금 자신에게 까닭 없이 주먹질을 하는 야마모토와 다름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우리 동네는 일본인 집단촌과 인접해 있었다. 짓궂고 힘 센 일본아이는 길에서 노는 우리를 훼방 놓기 일쑤였다. 게다가 이따금 주먹질까지 했다. 일본 아이들이 어째서 여기에 와 사는지 알 수 없었다. 뱃속에 화근을 안고 조잡들어야 하는 처지는 우리 마을아이들 모두가 같았다.

해방 후 일본아이들이 제 나라로 떠나 세상은 우리들 천지가 되었다. 그러나 어른들은 패가 갈렸다. 열세 살 때 치른 6·25전쟁은 동네 분위기를 살벌하게 만들었다. 좌익인 꼬마둥이의 아버지는 북으로 떠났고, 뒤짱구의 아버지는 부르주아라고 해서 인민군이 읍내에 들어온 뒤 북으로 끌려갔다. 나의 이종사촌 형은 국군포로가 되어 소식이 없다. 집안이 몰락한 꼬마둥이와 뒤짱구는 학교를 중도에 포기해야 했다. 나는 꼬마둥이와 뒤짱구를 1년에 한두 번 만난다.

지난 광복절엔 서울에서 남북의 사람들이 ‘민족대축전’을 치렀다. 이산가족들은 화상상봉도 했다. 내가 이종사촌 형의 생사가 궁금하듯, 꼬마둥이와 뒤짱구도 같은 심정일 것이다. 우린 어릴 때 일본을 ‘회충’이라고 했다. 지금은 미국을 ‘회충’이라며 보아란 듯 나서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국가도 ‘마니에리스모’처럼 국제사회의 구조적 문제 때문에 우여곡절을 겪었다. 국내외의 많은 문제를 봉합하기 위해 세월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8월이다. 광복 ‘이순’이 되었으므로.

/ 언론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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