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칼럼/女傑, 현정은 회장

500마리의 소 떼를 실은 트럭 행렬은 장관이었다. 판문점을 넘어 북으로 달렸다. 내외신은 다투어 크게 보도했다. 1998년 6월의 일이다. 소떼를 이끌었던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고인이 됐다.

고인이 됐지만 그는 역사속에 남는다. 언젠가 평화통일이 되면 통일의 물꼬를 튼 인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2000년 6월15일 김대중·김정일 두 정상의 만남을 주선한 배후 인물이 소떼를 몰고간 정주영이다. 그리고 오늘의 남북경협에 시발점이 되는 금강산관광사업의 첫 출항으로 금강호가 뜬 게 그해 11월이다.

만 7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현대는 약 10억5천300만달러(1조530억원)를 금강산사업에 쏟아 부었다. 돈을 번 것도 아니다. 지난해만 7억가량의 순익을 남겼을 뿐 거의 해마다 적자를 면치 못했다. 금강산 관광 대가외에 방만한 투자가 없었던 건 아니다. 금강산 시설물 공사로 1억4천461만달러(1천735억3천200만원), 유경 정주영체육관 건립비 4천776만달러(573억1천200만원), 컬러 텔레비전 수상기 5만대 공급에 740만달러(88억8천만원) 등 이밖에도 허다한 공식 및 비공식 지원이 많았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대북사업 철수 가능성을 공개하고 나섰다. 시아버지 정주영 명예회장, 남편 정몽헌 회장이 심혈을 기울였던 대북사업이다. 시아버지도, 남편도 갔다. 유지를 받들기 위해 개성관광사업에 이어 백두산관광사업을 따냈다. 백두산은 지금 천지를 중심으로 북녘 땅과 중국 땅으로 나뉘었으나 원래는 다 북녘 땅이다. 이를 반반으로 갈라 중국땅이 된 게 1953년 한국전쟁 휴전 후 중공군 참전 대가로 내준 영토 할양이다. 이래서 중국땅을 통해 백두산 관광을 다녀올 수 있었던 사람이 그동안 많긴 하지만 생각하면 가슴 아픈 일이다.

어떻든 북녘 땅을 밟아 천지를 오를 수 있는 백두산관광사업은 현정은 회장으로서는 시아버지와 남편의 유지를 받드는 연장선이다. 이 과정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기도 했다. 한참 상승하는 현정은의 의욕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북측의 돌변이다. 백두산관광사업을 무기 연기시켰다. 심지어는 현대가 이미 시범관광까지 가진 개성관광사업을 다른 파트너를 구해 넘기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현대아산과 북의 아태평화위원회는 대북사업의 직통 창구다.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이 독단으로 가진 모종의 대북 커넥션이 문제가 되어 현대는 그를 일선에서 후퇴시켰다. 아태는 김윤규씨의 일선 복귀를 강력히 요구했으나 현정은 회장의 거부는 단호하였다. 북측은 이에 심사가 뒤틀렸다.

현대는 계약상으론 금강산, 개성, 백두산 등 주요 관광지의 토지 이용권을 50년간 독점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 대북관광사업은 현대의 독점권이다. 그러나 계약을 담보할 수 있는 기속력이 없다. 대북사업 투자의 허점이 이에 있지만 현대는 주저치 않는다. “투자는 포기하면 그만이다. 더 잃을 것은 없다. 부당한 이익보다는 정직한 양심을 선택하겠다”며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대북사업의 기로”를 선언했다. 공을 넘겨받은 북측의 반응은 아직 없다. 어쩌면 금강산관광사업을 압박하고 나올지 모른다. 아니면 냉각기간을 두고 쌍방 합의의 돌파구를 모색할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현대의 대북관광사업 독점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북의 파트너 바꾸기에 군침을 삼키는 국내 자본이 있어서는 안된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북의 입맛들이기에 휘둘려서는 대북사업이고 뭐고, 너도나도 죽도밥도 안된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생각이다. 그가 소 떼를 몰고가서 금강산관광사업을 따낼 때, 돈을 번다고 확신했을 지 어쨌는 지가 궁금하다. 그동안의 관광객이 약 70만명이다. 당초 예상한 연간 50만명에 비하면 비교가 안된다. 현대는 이래도 사업수익과 상관없이 매월 일정금액을 입금하는 럼섬(lump sum) 방식의 계약에 따라 송금해야 한다.

하지만 정주영은 또 다른 야심을 가질 수 있었다. 그의 말년을 남북의 물꼬, 통일의 물꼬를 트는데 기여했다는 말을 듣고싶어 했다고 보는 추측이 가능하고 또 그런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다. 남편을 대신해 대를 이어받은 며느리는 북측이 당장은 어떻게 나오든 대북사업의 기득권은 변함이 있을 수 없다고 보는 것 같다. 북의 길들이기에 끌려가지 않고 되레 길들이는 결단이 여걸답다.

/임 양 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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